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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76 | 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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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78 |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
| 79 | ===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 | |
| 80 | 1453년 3월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의 거사를 모의할 때 참여하여 어린 단종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이때 그는 수양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건의한다.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은 수양대군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회유와 권고로 정난공신의 지위를 일단 수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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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쳐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우부승지 권람, 동부승지 구치관과 함께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해 7월 경희전 고 동가제의 찬례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부종묘 추향 대제의 아헌관 이하의 관료를 포상할 때 채단초 각각 1필을 하사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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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군된 뒤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그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 주청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을 받아들고 귀국길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456년 귀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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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명나라에 있을 당시 대명회통과 송서, 한서, 수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탐독하였고 중국의 문인들을 만나 시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귀국 후, 그는 세조의 책봉 고명을 성사시킨 공으로 그는 많은 양의 황금과 토지, 노비, 안마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세조의 총애를 얻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병조판서로 재직 중 전라남도와 다도해 해안가를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고 되돌아왔다. | |
| 79 | 87 | === 사육신의 난과 단종복위운동 === |
| 80 |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재회했다. 이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 |
| 88 | 귀국 직후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재회했다. 이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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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90 | 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가 22살로 세상을 떠나고 큰며느리 한명회의 딸이 손자 신종호(세째)를 낳았으니 어린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심경을 헤아려 볼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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