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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4 |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조선)|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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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36 |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
| 37 | == 생애 == | |
| 38 | 1417년(태종 17년) 음력 6월 20일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를 지낸 정유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 신중주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신말주가 태어났다. 또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부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삼촌 신평의 딸로, 신숙주는 연산군에게는 외외재종조부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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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은 전의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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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 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신중주·신숙주·신송주·신말주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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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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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다.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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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 윤경연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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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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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와 부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에 장원한 뒤, 복시에도 장원하였다. | |
| 37 | 53 | == 사망 == |
| 38 | 54 |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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