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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달인이라며 칭찬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을 예로 들며 외교든 대인 접빈이든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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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를 겸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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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적 편찬과 영의정 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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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즉위하자 그를 추대한 공로로 1471년(성종 2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계에 남아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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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병력 1만 이상을 증강하도록 건의하여 병력을 양성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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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 공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공신과 훈구파의 세력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신숙주는 평생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위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과 덕망높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은 묻혀지게 된다. 그러나 김시습만큼은 그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의 가마나 교자 행차 시에 나타나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야유를 보냈다. 신숙주의 하인들이 김시습을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하인들을 나무라며 만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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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포의 한강변에 담담정을 짓고 문인,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서실을 짓고 문인들에게 글과 사서육경, 역사와 고전 등을 가르치는 한편 그림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서실에는 많은 글과 학문, 그림,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육신과 생육신은 단종에게는 충신이지만 세조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니며 개인에게는 충신이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봤을 때는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한편으로 동료 공신들의 전횡을 눈여겨보면서 그는 공신들의 영화가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자신의 손자 신용개를 김종직에게 보내 수학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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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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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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