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29 vs r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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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98 |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신분만 비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에 혼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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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100 | 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
| 101 | === [[영의정]] 임명 === | |
| 102 | 1462년(세조 8년) 5월 20일 영의정부사로 승진하였다. 그의 영의정부사 임명 직후 사육신과 갈라선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일단 사임하였다가 다시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했다. 세조는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사직하여 물러났다. 1464년(세조 10년) 영춘추관사가 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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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하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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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1466년 9월 외직에 오래 머물렀던 공신 양정이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하라고 진언하였다. 신숙주 등은 그의 발언을 말렸으나 사태는 확대되었다. 양정의 취중 발언에 화가 난 세조는 승지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황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하니 승지들은 한사코 이에 응하려 하지 않고 기세가 매우 험악하였다. 신숙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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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 때 난에 협력했다는 무고를 당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67년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 |
| 101 | 109 | == 사망 == |
| 102 | 110 |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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