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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62 |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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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64 |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을 50척, 세사미두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
| 65 | === 한글 창제 === | |
| 66 |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그는 [[세종(조선)|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세종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사용 손수산 등과 함께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갔고, 황찬을 만나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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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신숙주는 집현전 내에서 새로운 글 연구를 찬성, 지지하는 입장에 섰으며 같은 편에는 신숙주와 그의 스승의 한 사람인 정인지, 신숙주의 동료인 성삼문, 정창손, 박팽년 등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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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또한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도 태평관에 친히 왕래하면서 사신으로 온 명나라학자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그의 학문열에 감격받은 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인 기생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며 연구하였다 한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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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조선)|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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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1447년(세종 29년) 집현전 부응교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어 사헌부장령, 집의를 지냈으며 겸경연시강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과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숙주는 외국어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독서로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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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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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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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80 | 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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