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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53 | * 1973년 11월 10일, 안창호의 묘는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원래 로스앤젤레스에 안장되어있던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옮겨와 함께 합장되었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던 안창호의 묘는 가묘로 보존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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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55 | *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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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 == 사상과 신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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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 === 4대 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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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 * 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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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 * 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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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 * 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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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 * 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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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 === 실력양성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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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 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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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실력 양성론에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감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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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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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 === 거짓 망국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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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 안창호는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갔다고 봤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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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 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라며 공직을 통해 부당한 재물을 축재한 것 역시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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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 그에 의하면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최대의 원인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심지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원수다'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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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진실이다. 그의 인격은 참의 인격이요, 그의 철학은 진실의 철학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한국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도 ‘참’이 그의 교육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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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요구했다. 그는 저마다 ‘참’의 공부를 하자, 온 국민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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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 === 대공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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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 1927년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대공주의를 역설하였다. 이는 이념, 계파, 파벌을 떠나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것이며,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과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설립되면서부터 그는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오. 공과 사 중 한쪽을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공주의를 발표하면서 그는 여기에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추가하였다. 대공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급속히 세력이 커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내려는 의도에서 이를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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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 | 1919년 안창호는 독립운동기간에 서로 엄히 지킬 맹약으로서 공금을 횡령하지 못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공금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행위는 용서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920년 1월 3일 상해에서 신년 축하회가 열렸을 때 5시간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육대사업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지탄하며, 임시정부의 직원들은 사사로운 감정과 사사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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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 | 또한 안창호는 '물방황'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유명한 사기의 한 구절을 들어 '사투(私鬪, 사적인 싸움)에는 겁을 품고, 공전(公戰, 공적인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대공주의라는 것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응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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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목표인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인 어떤 것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가치를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 수용하였다. 대공주의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정치,경제,사회,교육의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대우 보장'을,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등을 통한 평화적 세계질서 수립'을 그 존립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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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 | === 교육입국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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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 실력양성론의 방법의 하나로 그는 교육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이 곧 도탄과 식민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1899년 평양에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를 건립하였고, 그와 생각이 같던 이동휘, 윤치호, 양기탁 등이 그의 점진학교, 대성학교의 운영에 적극 협력, 동참한다. 1926년 중국 난징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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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 그의 교육입국론에도 감화된 김성수 등은 학교 신설과 경영난을 겪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장덕수, 윤치호 등은 이화여전, 근화여학교 등의 재단 이사로 참여하며 이들 사립 학교 재단의 재정적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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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 [[안창호/사상과 신념|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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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안창호/사상과 신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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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58 | == 활동가로서의 의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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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 59 |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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