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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6대 국무령
안창호[1]
安昌浩 | Ahn Chang-ho
파일:안창호 사진.jpg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현
(現 남포시 천리마구역)[2]
사망
1938년 3월 10일 (향년 59세)
경기도 경성부 연건동 경성제국대학병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사인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
국적
학력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가족
아버지 : 안흥국
어머니 : 제안 황씨
배우자 : 이혜련
아들 :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
딸 : 안수산, 안수라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임기
1926년 5월 3일~1926년 5월 16일
전임
이동녕 (제5대)
후임
이동녕 (제7대)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유년기와 수학문제3.2. 교육 계몽 운동3.3. 독립 운동가 사회 활동3.4. 임시정부 참여3.5. 홍커우공원 의거와 체포, 수감3.6. 감옥 생활3.7. 수양동우회 사건
4. 사망5. 사망 이후6. 사상과 신념
6.1. 4대 정신6.2. 실력양성론6.3. 거짓 망국론6.4. 대공주의6.5. 교육입국론
7. 활동가로서의 의의8. 저서9. 평가
9.1. 긍정적인 평가9.2. 부정적 평가
10.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안창호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2. 상세[편집]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 24일, 안창호가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해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3. 생애[편집]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1878년 11월 9일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4]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다. 그러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이름을 창호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목동 생활을 하며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돌아다녔다.

3.1. 유년기와 수학문제[편집]

1892년(고종 29년) 평안남도 대동군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그는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다. 이때 안창호는 저명한 성리학자인 김현진에게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하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16세때 안창호는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군의 진입을 보고 자신이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이 반대했고 온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는 홀로 경성부로 가려 했다.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가출하여 차를 타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이어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였다.

무작정 경성에 올라온 안창호는 어느 날 경성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 고 권하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장로교에서 설립한 구세학당(求世學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또한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하였다. 장로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 사상을 준 필대은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3.2. 교육 계몽 운동[편집]

1897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였는데, 상급 학부로 진학하지 않고 보통부의 조교로 취직하였다. 그해 고향으로 잠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은 안성 이씨 이석관(李錫寶)의 장녀 이혜련(李惠練, 당시 13세)여사와 성혼시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파혼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혼하지 못하고 다시 경성부로 되돌아와야 했다.

1897년, 서재필·이승만·유길준·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이상재, 윤치호, 이동녕, 이승만, 양기탁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곧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그는 청년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광무 1년) 11월 경성부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성토하였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의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안창호는 은신해 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1902년(광무 5년) 이혜련과 결혼하였고 그 해 11월 4일 아내 이혜련과 함께 배편으로 출국,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본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

3.3. 독립 운동가 사회 활동[편집]

1907년(광무 10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로 한다.[8] 그의 강연에 감화받은 조만식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8] 1907년 2월에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7년(융희 1년) 그는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 즉시 안창호는 양기탁, 윤치호, 전덕기, 김구, 유길준, 이동휘, 이갑, 이회영, 이승훈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소집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민중을 계몽, 문맹과 구습을 타파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어 안창호는 신민회를 경성부에서 조직하였다. 그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청년 지사들의 교육 외에 그들로 하여금 교육, 계몽 강연, 언론, 산업, 문맹 타파, 문자 교육, 농촌 계몽 등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1907년 안창호는 양기탁, 윤치호 등과 신민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회장직은 윤치호가 선출되고 그는 간사로서 행동 강령을 직접 초안한다.

또한 그 해,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1908년(융희 2년) 경성부의 중앙학회를 본 뒤, 중앙학회를 본따 장학재단인 서북학회를 창립하였다. 서점인 태극서관의 평양, 서울, 대구지사 설립을 계획, 후원하여 독서를 보급하려 노력하였다. 그해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는데 투자, 직접 참여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교육과 지원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각지를 순행하며 각지의 신민회 지역간부들을 만나 사업을 의논하였다.

1908년 선천군, 철산군 등에서 김진후의 희사금 2만원과 오치은의 재정적 원조를 얻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교장에는 윤치호를 초빙, 임명되었다.[9] 그런데 대성학교의 아침 체조시간은 군사훈련을 방불케 한다고 알려져 당국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각 사립학교에서도 체조시간을 강건한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과목으로 중요시 하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과 교육자들, 한국통감부조차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됐다.

어느 날 대성학교 학생들은 체육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서 곤봉을 둘러메고 '행보가'를 부르며 행진하던 학생들은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망국의 비운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병이나 군대는 이미 해산되어 강병정책의 수행이 불가능하니 학교교육의 체조시간을 통해서나마 이러한 민족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우렁찬 기상을 선보였다.

또한 안창호는 가끔 학생들에게 야간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험산준곡 이나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 올라가게 하여 담력을 기르게 하기도 하였다. 한국통감부는 이를 두고 눈 덮인 광야나 폭염을 가리지 않고 전술강화훈련을 시키고 있다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사립학교의 병식교련을 두고 통감부와 수시로 마찰을 빚게 되었다.

3.4. 임시정부 참여[편집]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3]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되었다. 그 뒤 여러 곳 각지에 선출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일은 안창호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5월 25일 미국으로 출국, 그날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자신이 맡을 수도 있었으나 기호파의 반발을 예상한 그는 다른 사람을 수반으로 하고 자신은 내무나 실무부서 자리를 원하였다. 임정에서는 그의 조건을 수락하였고 그는 바로 취임하였다.

1919년,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서 나랏일을 보았다. 이후 그를 대통령 대리로 선정하려 했으나 그는 애써 사양하였고 대신 1919년 6월 28일, 그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9월, 국무총리로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온 이동휘와 1920년 말에 온 이승만은 서로 강력히 대립하였다. 이동휘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를 채택해야 한다 했고, 이승만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적용하자고 하여 갈등이 계속되었다. 안창호는 이 둘을 중재하고 화해를 주선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적극적인 중재는 실패하여 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나고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4월에는 날쌘 청년 남자들을 선발하여 일제강점기하 조선에 보내 정보를 수집해오게 했으나 4월말 모두 조선총독부에 체포되면서 실패한다. 한편 안창호는 임정 창조파와 개조파들을 설득하였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만다. 1922년 7월에는 김구, 신익희, 조소앙, 이시영, 여운형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3.5. 홍커우공원 의거와 체포, 수감[편집]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성사되자 김구는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을 연락했지만 그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4월 29일 동지 이유필의 딸 생일에 선물을 사준다던 약속을 지키러 이유필의 집에 도착하던 중, 윤봉길과 상해 홍구 폭탄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합세한 불조계 프랑스 영사관 관헌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인도되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상하이 영사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5월에는 배편으로 서울로 호송돼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은 윤봉길 의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석방되지 못하였다. 그가 체포되면서 안창호와 흥사단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독립당 추진 운동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윤치호는 그가 사건에 관계되었을리 없다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안창호는 구속되었다가 재판을 받게 된다. 검찰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은 윤봉길 의거 사건과 무관함을 역설하였다. 허위 자백 요구에 그는 아는 사실이 없다며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며 당당하였다. 뚜렷한 혐의점이나 관련성이 없었는데도 조선총독부 사법부 당국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안창호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하였다.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한 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 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안창호가 언제 그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까지는 정확히 기록하지 않아 그 이전에 발언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3.6. 감옥 생활[편집]

일인 간수들에게서 "기다나이야츠!(더러운 자식)"라고 욕을 들을 만큼 온몸에 병이 든 것은 일제에 의한 대전 감옥 생활과 종로 유치장 생활 때문이었다. 대전 감옥 생활로 그의 숙환인 소화불량이 더욱 악화되었고, 폐와 간이 나빠졌다. 안창호의 임종시의 병명은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겸 위하수증」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항상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비서 구익균이 그에게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항상 말해도 끝내 못 끊다가 나중에 감옥에 가서야 끊었다. 그러나 금단 현상 역시 옥중의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1935년 2월 질병의 악화로 병보석을 신청, 윤치호, 김성수, 이광수 등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국내로 압송된 이후 5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1935년 2월 대전 감옥에서 가출옥, 출소 후 열차편으로 전국 지역을 순회강연을 다니다가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였다. 이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산장으로 찾아오는 많은 친구와 동지들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설하면서 안창호는 평남선 강선역에서 북쪽으로 바라다보이는 달마산 아래에 그가 평생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수양동우회 사건과 연이은 병원 입원으로 실패하고 만다.

3.7. 수양동우회 사건[편집]

1937년 6월 28일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일경의 고문을 당하였다. 그의 친구인 윤치호와 안창호를 평소에 흠모하던 김성수는 그에게 영치금을 보내 주었고,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하여 석방, 구명 운동을 하였다. 1937년 11월 1일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세가 심하여 12월 보석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졌다. 12월 24일 신병으로 병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병원)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자신의 전 유산과 전 재산을 대성학교와 이상촌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24] 등에 헌신하고 평생 가난했던 그는 병원비를 제대로 댈 수 없었다. 윤치호와 김성수, 이광수 그리고 장리욱, 안병욱, 주요한 등이 그의 병원비를 댔다. 그러나 간장염과 고문 후유증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 입원 중 냉방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때 병세가 악화되었다.

4. 사망[편집]

친구인 윤치호와 그를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수가 고급 한약을 보냈지만 여러 병의 합병증으로 고생하여 낫지 않았다. 그의 외조카 김순원과 조카딸 안성결, 그의 제자인 박정호 등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독립운동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거들면서 번갈아가면서 안창호의 시중을 들며 끝까지 지성껏 병간호를 했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은 병원비를 지불했고 수시로 그를 찾아 문안했다. 1938년 그는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38년 초 그는 병상에서 일본 천황 무쓰히토(睦仁, 메이지 천황)를 규탄하는 소리를 일갈하여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병상에서 안창호는 선우씨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 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하였다. 몸이 극도로 수척하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수염은 희고, 머리의 반은 누렇고 반은 희어 황백색이었다. 

그가 만년에 경성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얼굴이 많이 부어 있는 상태였다. 1938년 3월 10일 0시 5분 안창호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61세를 일기로 간경화와 소화불량,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광수, 김성수, 여운형, 여운홍, 윤치영, 장택상 등이 참석하였다.

5. 사망 이후[편집]

  • 안창호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망우 역사 문화공원의 유상규 묘역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보내 만일의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망우리 묘소 장지의 출입을 통제, 감시하였으며 안창호의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도 금지시켰다.
  • 일제의 현상금으로 인해, 국내에 들어와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안창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를 지어보내 비록 독립운동의 방향과 의견 차이로 인해 다투기도하고 서로 돕기도 하였던 지난 날을 생각하며 애도를 표했다.
  • 그 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되었고, 해방 뒤에도 김구의 귀국 이후, 김구, 김성수, 이광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이어졌다.
  • 윤치호에 의하면 이광수, 현제명, 주요한 등은 안창호가 죽자 마자 등을 돌리고 조선총독부에 아첨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 제1공화국 기간 중에도 흥사단과, 그를 존경하던 김성수, 장택상, 그리고 한때 그의 수양동우회 회원이었던 조병옥 등에 의해 계속 추모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 1973년 11월 10일, 안창호의 묘는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원래 로스앤젤레스에 안장되어있던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옮겨와 함께 합장되었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던 안창호의 묘는 가묘로 보존되고 있다.
  •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졌다.

6. 사상과 신념[편집]

6.1. 4대 정신[편집]

  • 무실
  • 역행
  • 충의
  • 용감

6.2. 실력양성론[편집]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 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실력 양성론에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감화받았다.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었다.

6.3. 거짓 망국론[편집]

안창호는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갔다고 봤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

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라며 공직을 통해 부당한 재물을 축재한 것 역시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최대의 원인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심지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원수다'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진실이다. 그의 인격은 참의 인격이요, 그의 철학은 진실의 철학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한국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도 ‘참’이 그의 교육 이념이었다.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요구했다. 그는 저마다 ‘참’의 공부를 하자, 온 국민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6.4. 대공주의[편집]

1927년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대공주의를 역설하였다. 이는 이념, 계파, 파벌을 떠나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것이며,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과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설립되면서부터 그는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오. 공과 사 중 한쪽을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공주의를 발표하면서 그는 여기에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추가하였다. 대공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급속히 세력이 커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내려는 의도에서 이를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1919년 안창호는 독립운동기간에 서로 엄히 지킬 맹약으로서 공금을 횡령하지 못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공금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행위는 용서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920년 1월 3일 상해에서 신년 축하회가 열렸을 때 5시간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육대사업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지탄하며, 임시정부의 직원들은 사사로운 감정과 사사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안창호는 '물방황'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유명한 사기의 한 구절을 들어 '사투(私鬪, 사적인 싸움)에는 겁을 품고, 공전(公戰, 공적인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대공주의라는 것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응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이념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목표인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인 어떤 것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가치를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 수용하였다. 대공주의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정치,경제,사회,교육의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대우 보장'을,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등을 통한 평화적 세계질서 수립'을 그 존립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6.5. 교육입국론[편집]

실력양성론의 방법의 하나로 그는 교육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이 곧 도탄과 식민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1899년 평양에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를 건립하였고, 그와 생각이 같던 이동휘, 윤치호, 양기탁 등이 그의 점진학교, 대성학교의 운영에 적극 협력, 동참한다. 1926년 중국 난징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교육입국론에도 감화된 김성수 등은 학교 신설과 경영난을 겪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장덕수, 윤치호 등은 이화여전, 근화여학교 등의 재단 이사로 참여하며 이들 사립 학교 재단의 재정적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7. 활동가로서의 의의[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8. 저서[편집]

  • 안창호 일기
  • 도산 안창호 서한집 : 영원한 청년 안창호의 러브레터》

9. 평가[편집]

9.1. 긍정적인 평가[편집]

안창호는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등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개량주의자', '조선독립불가론자', '자치론자'등 독립운동계에 파벌을 조장시키고 민족개량주의를 양성시킨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32] 실제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 그의 노선을 추종했던 인물 1930년대 중반이후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안창호 자신은 언제나 중립적 입장에서 평행선을 유지하려 했었고, 파벌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극히 원하지 않았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경제, 정치, 언론, 문화 각 방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인재양성과 재정 확보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이 장벽에 부딪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국을 전환하여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당대의 시각에서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오만불손한 마음과 유아독존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도산에게서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뇌와 언변과 통솔력과 용기와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절대 자만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 서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높이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낮추는 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안창호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은 참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라고 평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택상은 그를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베를린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여관에 함께 묵고 있을 동안에 안창호를 만날 수 있었다. 장택상은 '그의 인상 중에서도 웅변술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명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 강행에 안창호가 주장한 '강산개조론'이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9.2. 부정적 평가[편집]

안창호의 소위 실력 양성론은 적극적 독립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원래 문서에서는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쓰여있었으나 청포도출판서의 안창호 평전을 보면, 장남 필립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파 지식인 박노자 교수는 그를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안병욱 교수는 도산의 사상을 '힘의 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이런 힘의 철학을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와 결부시켜, 그의 점진주의 혹은 준비론은 결과적으로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국권상실의 책임을 안으로 돌림으로서 외부의 적에 대한 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의지를 무력화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의 점진적 독립운동 방법론은 근본적 변화를 무시하고 착취와 수탈의 기본적 식민지 구조 안에서 제한된 개선만을 시도할 뿐이며 결국 현실도피적인 이상촌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비판도 있다.

10.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별칭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가 있다.[2] #[3] 국가 내정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행정부 부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