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국기 | 국장 | |
광명천지[1] 光明天地 | ||
칭제건원 이전 | 멸망 이후 | |
기본 정보 | ||
성립일 | 1897년 10월 12일 | |
멸망일 | 1910년 8월 29일 | |
현재 국가 | ||
수도 | 한성부 | |
국가 | 애국가 | |
국화 | 오얏꽃 | |
종교 | 유교 불교 무속신앙 도교 기독교 천도교 | |
인문 | ||
공용어 | 근대 한국어 | |
출신 | 한국인 | |
인구 | 17,082,000[2] | |
입법부 | 대한제국 중추원 없음 (법령에 의한 규칙) (1907년부터) | |
정치 | ||
황제 | 고종(1897년~1907년) 순종(1907년~1910년) | |
윤용선(1896년~1898년) 이완용(1907년~1910년) | ||
입법부 | 대한제국 중추원 없음 (법령에 의한 규칙) (1907년부터) |
1. 개요[편집]
대한제국 또는 대한국, 구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제국으로 조선을 계승한 국가이자 한반도의 마지막 전제군주국이다.
2. 상세[편집]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기간과 그 주변 기간을 합쳐 구한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수립 선포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했고, 자주적 국가가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게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이후 1910년 8월 29일 일본과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에서 따라 일본제국과의 승인을 거쳐 병합하여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대한제국의 정궁은 덕수궁과 경복궁이며, 중요한 행사는 경복궁이지만, 일반적으로 황실의 생활공간은 덕수궁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3. 국호[편집]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국,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은 1882년부터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로 정하고, 국장을 이화문으로 하였으며, 애국가(愛國歌)를 국가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大韓)’이다. 대한이라는 말은 '삼한'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를 통틀어서 삼한이라 불렀는데, 그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 한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국호의 어원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마한, 진한, 변한은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10세기의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뒷 문장에 마한, 진한, 변한이 고려에 이르러서 통합되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하였기에 ‘제’가 더해져 대한제국이 되었다. 이 이름에 쓰인 대한이라는 이름은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취지로 국호로 재사용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따라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호에도 여전히 그대로 이어졌다.
4. 역사[편집]
4.1. 건국[편집]
임오군란 이후의 청나라의 간섭과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위시한 외세로 말미암아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독립협회의 고종 환궁요구와 조선의 자주독립 주장에 힘입어 대한제국이 성립되게 이르렀다.
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서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정양과 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으나 교전소 위원이 친미개화파와 외국인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원로대신들이 꺼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서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정양과 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으나 교전소 위원이 친미개화파와 외국인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원로대신들이 꺼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4.2.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편집]
대한제국이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부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갈등했다.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데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의 참정권을 주장했고 국회의 설치로 국민 대표자를 뽑자고 요구했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참정권 주장과 국회 설치 주장을 반역으로 규정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광무 2년) 11월 중추원 관제 개편을 공포했으나 수구파는 이에 익명서 사건을 명분 삼아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하였으며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행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절파(折破)가 결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 제국이 수구파 행정부에 가담하여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게끔 권고하자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고 곧이어 보부상들이 주축이 된 단체인 황국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여 독립협회는 1898년(광무 2년) 12월 해산되고 만민공동회도 1899년 12월 이후 불법화하였다.
4.3. 광무개혁[편집]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서구화하고 근대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반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에 따라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무게와 측량의 기준이 하나로 표준화되었다.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를 개시하여 소유지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연관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맡았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발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이에 따라 설립되었다. 1896년 최초로 전화기가 한국에 도입되었고, 6년 후인 1902년 장거리 공중전화가 최초로 개설되었다. 1899년에는 대한제국 정부 산하의 서북철도국이 설립되었다. 또한 광무개혁 기간 동안, 산업 진흥 정책도 추진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이에 따라 설립되었다. 1896년 최초로 전화기가 한국에 도입되었고, 6년 후인 1902년 장거리 공중전화가 최초로 개설되었다. 1899년에는 대한제국 정부 산하의 서북철도국이 설립되었다. 또한 광무개혁 기간 동안, 산업 진흥 정책도 추진되었다.
4.4. 멸망[편집]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세력다툼이 끝나고 일본 제국으로부터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 협약 때 외교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고종은 비밀리에 밀서를 작성해 열강 세력에 을사조약의 불법적 체결과 무효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태황제가 7월 20일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 로 정하였다.
융희황제가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8월 ~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9년(융희 3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 넘겨 주게 되고(기유각서),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된다. 일본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한일 병탄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하였다. 조약 체결과 동시에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인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5,000년 간 지속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융희황제가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8월 ~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9년(융희 3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 넘겨 주게 되고(기유각서),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된다. 일본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한일 병탄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하였다. 조약 체결과 동시에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인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5,000년 간 지속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5. 군사[편집]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1893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강화도에 설립하였으며 영국 해군 대위 코렐과 부사관 허치슨이 강화도에 들어와 해군 생도들의 근대적 군사훈련을 맡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한국의 신식 군대가 편제, 계급과 군복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1894년 10월 4일 칙령 제10호가 반포되면서 군대 계급을 장교와 부사관, 병졸로 크게 나누고 장교는 대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과 정령, 부령, 참령의 영관급, 그리고 대장, 부장, 참장의 장관급으로 다시 구분하고 부사관은 참교, 부교, 정교의 3등급, 병졸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그 외에 무관생도가 있었다. 대장은 총리대신급과 같고, 부장은 대신급, 참장은 차관급이었다.
고종은 1899년 원수부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였다. 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이며 대원수인 고종이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관제는 “대황제 폐하께서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시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신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종 32년(1895) 4월 한국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종은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검은색 군복의 오얏꽃(자두꽃) 문양 단추는 대한제국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 군복에 부착하였다.
고종은 1903년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이다. 양무호는 길이 105m, 무게 3,000톤, 총 배수량이 3,432톤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이었으며, 1904년 또 다른 근대식 전함을 구매하는데, 그것은 바로 광제호였다. 광제호는 총 배수량 1,056톤으로 최신식 3인치 대포 3문을 3개 장착하고 있으며 태극기를 달고 운항했다.
1894년 10월 4일 칙령 제10호가 반포되면서 군대 계급을 장교와 부사관, 병졸로 크게 나누고 장교는 대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과 정령, 부령, 참령의 영관급, 그리고 대장, 부장, 참장의 장관급으로 다시 구분하고 부사관은 참교, 부교, 정교의 3등급, 병졸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그 외에 무관생도가 있었다. 대장은 총리대신급과 같고, 부장은 대신급, 참장은 차관급이었다.
고종은 1899년 원수부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였다. 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이며 대원수인 고종이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관제는 “대황제 폐하께서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시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신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종 32년(1895) 4월 한국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종은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검은색 군복의 오얏꽃(자두꽃) 문양 단추는 대한제국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 군복에 부착하였다.
고종은 1903년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구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이다. 양무호는 길이 105m, 무게 3,000톤, 총 배수량이 3,432톤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이었으며, 1904년 또 다른 근대식 전함을 구매하는데, 그것은 바로 광제호였다. 광제호는 총 배수량 1,056톤으로 최신식 3인치 대포 3문을 3개 장착하고 있으며 태극기를 달고 운항했다.
6. 외교[편집]
1899년에는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이 맺어졌는데, 청나라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맺은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간도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간도 관리사를 설치하여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 제국은 이어서 1904년 11월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였고, 1905년 2월에 일본 제국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과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됨으로써 박탈당했다.
대한제국은 간도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간도 관리사를 설치하여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 제국은 이어서 1904년 11월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였고, 1905년 2월에 일본 제국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과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됨으로써 박탈당했다.
7. 역대 황제[편집]
대한제국 大韓帝國 | |
황실 문장 이화문 | |
호칭 | 폐하 |
관저 | 경운궁 → 창덕궁 |
창건자 | 고종(高宗) (1864년 ~ 1907년) |
마지막 군주 | 순종(純宗) (1907년 ~ 1910년) |
국호 | |
군주 직함 | 황제 (1897년 ~ 1910년) |
연호 | 광무 (1897년 ~ 1907년) 융희 (1907년 ~ 1910년) |
통치 국가 |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
- 1대 고종 : 1897년 10월 13일,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대군주를 황제로 칭하였으며 연호를 광무로 제정하였다. 대한제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전제군주제를 답습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국가원수로서 전제권력을 행사하였고, 원수부를 설치해 대원수의 위치에서 군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899년(광무 3년), 고종은 개국 시조인 태조와 자신의 4대 조상인 장종(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효명세자)을 소급하여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로, 익종의 묘호를 문조로 개칭하였다. 1908년(융희 2년), 순종은 정조의 양부인 진종과, 고종의 양형 헌종과 양숙부인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한국사의 마지막 세습군주이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발효된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국권이 피탈되면서 소멸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의 한반도의 국가원수는 일본 제국의 천황, 정부 수반은 조선 총독이 맡게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의 대한제국의 황제는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의 왕공족이 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이왕직은 폐지되었다.
- 2대 순종 : 1908년(융희 2년), 순종은 정조의 양부인 진종과, 고종의 양형 헌종과 양숙부인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한국사의 마지막 세습군주이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발효된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국권이 피탈되면서 소멸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의 한반도의 국가원수는 일본 제국의 천황, 정부 수반은 조선 총독이 맡게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의 대한제국의 황제는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의 왕공족이 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이왕직은 폐지되었다.
8. 훈장 제도[편집]
대한제국의 훈장은 1897년(광무 1년) 4월 17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제정되었다.
1897년(광무 1년) 4월 17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훈위금척대수장, 대훈위이화대수장, 태극장, 자응장이 제정되었다. 1897년(광무 1년) 4월 16일에 칙령 제10호로 조례를 개정하여 팔괘장이 추가되었다. 1898년(광무 2년) 8월 12일에 대훈위서성대수장이 추가되었다. 1898년(광무 2년) 3월 30일에 칙령 제2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서봉장이 제정되었다.
훈장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897년(광무 1년) 4월 17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훈위금척대수장, 대훈위이화대수장, 태극장, 자응장이 제정되었다. 1897년(광무 1년) 4월 16일에 칙령 제10호로 조례를 개정하여 팔괘장이 추가되었다. 1898년(광무 2년) 8월 12일에 대훈위서성대수장이 추가되었다. 1898년(광무 2년) 3월 30일에 칙령 제2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서봉장이 제정되었다.
훈장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대훈위금척대수장 : 훈등은 대훈위이고 등급은 없으며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이다. 훈장의 명칭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에서 얻은 금척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을 취하였다. 기본적으로 황실에서만 패용하나, 황족과 문무관 중에서 대훈위서성대수장을 받은 자가 특별한 훈공이 있을 때 황제의 특지로 수여되었다.
- 대훈위이화대수장 : 훈등은 대훈위이고 등급은 없으며 대훈위서성대수장 아래에 있고, 태극일등장 위에 있다. 훈장의 명칭은 나라의 문양에서 취하였다.문무관 중에서 태극일등장을 받은 자가 특별한 훈공이 있을 때 황제의 특지로 수여되었다.
- 태극장 : 훈등은 훈에 해당하고 일등에서 팔등까지로 구분되어 문무관 중에서 공이 뛰어난 사람에게 훈등에 따라 수여하였다. 훈장의 명칭은 나라의 표식에서 취한 것이다.
- 팔괘장 : 훈등은 훈에 해당하고 일등에서 팔등까지로 구분되어 문무관에게 훈등에 따라 수여하였다.
- 자응장 : 훈등은 공에 해당하고 일등에서 팔등까지로 구분되어 무관 중에서 공이 뛰어난 사람에게 훈등에 따라 수여하였다. 훈장의 명칭은 이성계의 무훈에서 비롯된 고사에서 취한 것이다.
- 서봉장 : 내명부, 외명부 가운데서 현숙한 덕행과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황후의 휘지를 거쳐 수여하였다. 훈장의 명칭과 의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궁중의 예장 봉황관에서 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