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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는 맹자· 순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 · 한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 시와 서 외에 역·예·춘추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이 성립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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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무제는 전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에 유교가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유교는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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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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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 유가 또는 유학은 본래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나라 왕조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 즉 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시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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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는 명칭의 뜻은 사람을 뜻하는 글자와 “필요하다“라는 뜻의 한자가 쓰였는데, 이에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 속에서 각 나라 사이에서의 전쟁과 내부적인 혼란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인재들이 필요하였었는데, 유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필요한 인재들" 혹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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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지배를 받던 과거에는 귀족적인 모습도 갖추며 발전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민중적이 되었으며 귀족적 잔재가 많이 남은 유교는 일본에서 볼 수 있다. 한족들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제거하려고 했고 그 결과 한족 귀족들은 한민족이나 야마토 민족의 귀족들과 달리 이른 시기에 전멸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귀족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교에 있어서도 귀족의 영향력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 시절은 물론 고려까지는 귀족 세력[11]이 만만치 않았으며 조선도 초기 혹은 사림 집권 전까지 귀족 출신[12]은 물론 제주 고씨처럼 전보다는 망했으나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도 그냥 음서 같은 특권을 얻거나 양반, 사대부 취급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순수 상민 출신과 양반 비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애매할 수 있으나 사림 세력의 팽창 이후 더욱 강해진 중국화에 따라 중인 취급(?)을 받는 옛 귀족들도 많아졌으며 이들은 다시 귀족 출신인 사실이 유리해진 일제강점기 때 재기에 성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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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근대 이전 민본주의나 능력주의를 담당하여서 유교사상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의 학,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왕도 정치를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드 중국사에 의하면 유교는 내부 통합은 몰라도 외부의 위협에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시각에 의하면 유학자들은 스스로 가진 힘으로 지배층이 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유교적 기질이 강했던 한송명 왕조는 적대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수혜를 베풀었고 이는 정복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유학자들보다 실리를 추구하여 중국에 더 나은 번영과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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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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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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