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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5 | == 개요 == |
| 6 | 6 | [[윤봉길]]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 |
| 7 | == 초기 == | |
| 8 |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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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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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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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 |
| 15 | == 농촌 계몽 활동 == | |
| 16 |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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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중국의 만주로 망명하였다. | |
| 19 | ==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 | |
| 20 |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 선생을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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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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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하고 내빈은 퇴장하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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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에 노림수를 사용하여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서 힘차게 던진 찰나에,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 그 틈을 노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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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여,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되는 등 일본 군 고위 간부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었는데, 당시 기념식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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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된 것이다. 당시 쑨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11월 2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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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반면, 일본 헌병대와 순사들이 조선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일제의 복수에 불과할 뿐 의사의 탓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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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당시 상하이에 위치해 있던 임시 정부 청사를 충칭으로 옮겨야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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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윤봉길은 그 자리 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제압당해 구타당한후 피투성이가 된체 끌려갔다. 그후 1932년 5월 25일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은 김구를 잡기위해 윤봉길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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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그러나 윤봉길은 고문당할 동안 김구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6개월후인 1932년 11월 18일 일본 기선 소속 '타이요마루' 라는 여객선에 실려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사형집행을 위해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보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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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그리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으로 끌려온 윤봉길은 사형직전까지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고 입가에는 웃음을 뛰는등 한치에 흔들림도 없었다 한다. 윤봉길은 십자가 목재형틀 양쪽팔이 묶이고 눈은 헝겊으로 가려졌다. 간수가 유언이 있냐묻자 그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말할바 없다한뒤, 오전 7시 27분 미간에 총알이 명중하며 13분뒤 숨을 거두었다. | |
| 41 | == 본 문서 정보 == | |
| 42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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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_%EC%B6%95%EA%B5%AC_%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