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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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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천황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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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신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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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은 당시의 조선인들이 상당히 미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신에 의존을 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이나 믿음 같은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19] 그는 형무소를 방문한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심은 없고 또 믿음에 대한 이해력도 낮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상태, 문화의 정도도 아직 일본 사람에게조차 미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미신적인 믿음, 습성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조선인에게는 인격적인 수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나는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 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조선인도 점점 발전해 일본인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여 피차 일본 국민으로서 유쾌하게 생활해 가게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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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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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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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로,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 평범한 삶에서 남 모를 식민지 사람의 고뇌가 있었고, 그럴수록 정직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다 민족문제를 느끼고 일왕의 저격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처럼 어릴 때부터 무슨 민족을 외치고 영웅이 되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인간의 길을 갔다. 더욱이 영웅적 거사를 마치고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처럼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가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의 범상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주의를 내세운 여타의 경우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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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 결성에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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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주석은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찾던중 이봉창과 조우했다. 이봉창은 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여 '최선봉장'이 되었다. 역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애국단은 당시 위기에 처한 임정의 활로를 열었는데, 그 애국단의 제1호 투쟁이 이봉창 의거로 나타남으로써 사실상의 출범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이 되어 [[광복군]] 창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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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거사는 임시정부를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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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랑스런 임정으로 기록되지만 당시 임정은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다. 집세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고 국내외의 동포로부터도 지지를 상실하여 존재가치를 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단행케 한다. 이로써 무엇보다 임정이 죽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셈이고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이어 윤봉길 의거까지 성공해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고 임정은 민족적 기반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임정은 이로써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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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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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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