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8 vs r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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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그를 비범하게 보았으나 못 들은 체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이봉창의 취중 장담을 기억한 김구는 며칠 뒤 여관으로 다시 찾아왔고 이봉창은 계획한 바를 설명하였다. 김구는 그가 비범한 뜻을 품었고 여러 사람들이 의심한 것과 전혀 다른,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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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 방면에서 종적을 감추고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으로 홍구에 거주하며 양수포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하여 다녔고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근무하여 일본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3, 4개월에 한번씩 비밀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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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의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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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 또는 사쿠라다문 의거는 1932년 1월 8일 [[일본 제국]] 도쿄의 사쿠라다문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 대해 일어난 실패한 암살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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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 대작 두 명이 부상하였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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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직후 그는 처음에는 김구가 누군지 모른다고 일관하다가 뒤에 김구의 존재를 시인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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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도쿄의 경찰서에 형법 제73조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곧 도요타마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 상태에서 그는 1월 8일 경시청에서 [[재판]]을 받고, 6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뒤,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를 받았다.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불교 서적을 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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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사건에 대해 제1차 공판을 하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이봉창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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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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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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