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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66 |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
| 67 | 67 | |
| 68 | 68 |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천황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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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1995년 12월,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 |
| 69 | 71 | == 사상과 신념 == |
| 70 | 72 | 이봉창은 당시의 조선인들이 상당히 미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신에 의존을 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이나 믿음 같은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19] 그는 형무소를 방문한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심은 없고 또 믿음에 대한 이해력도 낮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상태, 문화의 정도도 아직 일본 사람에게조차 미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미신적인 믿음, 습성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조선인에게는 인격적인 수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나는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 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조선인도 점점 발전해 일본인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여 피차 일본 국민으로서 유쾌하게 생활해 가게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 71 | 73 | ==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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