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7 vs r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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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24 |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부산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포에서 적선 20여 척을 불살랐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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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26 |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1592년 8월 16일 다시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네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
| 27 | == 벽파진 해전 == | |
| 28 |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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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이 전투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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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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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 |
| 27 | 35 | == 명량 해전 == |
| 28 | 36 |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 앞바다인 임하도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것으로 파악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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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90 | * [[https://ko.wikipedia.org/wiki/%EC%A0%88%EC%9D%B4%EB%8F%84_%ED%95%B4%EC%A0%84|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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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94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8%9C%EC%8B%A0|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