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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11 | 1597년 정유재란 직후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 받았다. 그러나 그해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되어 조선 수군을 복구하고, 그해 9월 13척의 배로 왜군 133척 중 31척을 격파했으며, 이듬해 3월 고금도로 영을 옮기고, 둔전을 마련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는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에 맞고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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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13 |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
| 14 | == 생애 == | |
| 15 | == 사망 == | |
| 16 |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11월 19일 새벽 2시 경 일본군을 만나 전투가 벌어져 계속하여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했다. 그는 선두로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남해 근처에서 일본군이 명나라 군대를 만나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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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과 함께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과 명의 장수 등자룡도 함께 전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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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 이회 등이 시신을 아산으로 운구, 반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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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이순신이 전사한 직후 1598년(선조 31) 12월에 정1품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영사에 증직되었다. 1604년 6월에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고 그해 7월에 증 좌의정 겸 경연영사를 가증했다. 또한 선조는 명나라에 건의했는데 '이순신은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 하늘을 돕고 해를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습니다.라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건의해 도독의 인수를 내리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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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또한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에게도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와 덕연부원군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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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1643년(인조 21) 3월에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해남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7월에 정조는 증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 |
| 14 | 27 | == 본 문서 정보 == |
| 15 | 2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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