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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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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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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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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둘 뿐인 정치 경력이 아예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나머지 한 명은 박정희이며 둘 다 장성급 장교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과 박정희 이외의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회의원 또는 장관이나 서울특별시장 등 정치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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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성적을 보면 이게 과연 장교로서 가져야 할 지적수준인가 라는 게 의심될 정도로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200명의 생도 중 200등으로 입학 성적은 꼴등이었으며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인 1951년은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시점인 탓에 생도들이 계속 퇴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120등 안에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기가 막히게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항상 퇴교 위기에 몰렸으며 교관들 조차 전두환이 언제 퇴교할 건지 시기를 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지만 계속 살아남았고 육사 11기 생도들은 200명 중 156명이 소위로 임관했는데 그 중 126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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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통령 재임 중 민족문화 장려정책에 따라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에는 김구의 차남 김신을 관장으로 선임했다.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7년부터 문교부를 출입하던 이유립 등의 역사가들을 계속 문교부 등에 초빙하여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사강연을 실시했다. 한편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일감정에 대해 극일(克日)정신을 주장하며 실력으로 일본을 이길 것을 강조하였다.대통령 후보 시절 7년 단임제를 주장했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재출마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재출마를 단념하고 노태우를 차기 주자로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한편 전두환은 후임자는 문민 통치자여야 된다며 1984년 경 국무총리 출신 노신영 등을 후계자로 낙점, 정치수업을 하려다가 신군부와 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의 반발로 취소하고 노태우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후계자로 잠정 낙점했던 인물은 노신영,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희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