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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全斗煥 | Chun Doo-hwan
기본 정보
출생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3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4)
사망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국적
본관
완산
학력
육군사관학교 11기 학사
정당
민주정의당 (1981년 ~ 1987년)
무소속 (1987년 ~ 2021년)
종교
불명
별명
호 : 일해
자 : 용성
가족
배우자 : 이순자
아들 :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딸 : 전효선
손자 : 전우석, 전우성, 전우원
손녀 : 전수현, 전혜현, 전가현
대통령
임기
1981년 3월 3일 ~ 1987년 6월 29일
국무총리
유창순 [1982년]
전임 후임
전임 : 최규하 (제 10대)
후임 : 노태우 (제 13대)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국군
복무 기간
1955년 2월 ~ 1980년 8월 22일
소속
최종계급
대장
지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연대 연대장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참전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2.2. 퇴임 후
3. 구속과 석방4. 사회 활동5. 2000년대 이후6. 상훈
6.1. 서훈이 취소된 훈장6.2. 서훈 취소
7. 사망 및 조문 논란8. 논란9. 평가와 비판10. 유행어11. 여담12.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2. 생애[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 대통령[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대통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퇴임 후[편집]

1988년 3월 4일에는 그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었다. 이는 그해 1월 29일에 추천 수속이 끝난 것이었다. 유럽의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87년의 KAL기 폭파추락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88년 2월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104]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내려간 후 11월 29일에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12월 31일에 국회 증언대에 섰고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했다.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이 있자 그는 명예총재직 제의를 사양했다.

3. 구속과 석방[편집]

1995년 12.12 5.18 재판과정 중 그는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그의 광주 좌파 발언이 알려지자 시인 공선옥 등은 그에게 인간이 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당시 그의 수인번호는 3124번이었다. 그러나 수시로 안양교도소에는 면회객이 줄을 이었고 교도관들도 전두환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수인번호로 호출하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이후 김영삼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과 반감은 계속됐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이후 친전두환 인사와 제5공화국 가신 세력에 의한 5공신당 창당이 시도됐으나 시민, 사회단체들의 반발과 정부의 압력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편 투옥 직후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를 두고 극작가 신봉승은 어리광, 땡깡이라며 조롱하였다. 12.12 사태와 5.18과 같은 또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던 전두환 대통령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리다가 백담사에 유배되었다'며 '그 후 또다시 구속, 수감되어서는 어처구니없게도 5공의 정통성을 수소한다는 구실'로 구치소에서 단식을 하는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고 조롱했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했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122] 전두환은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았던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박탈당했다.

4. 사회 활동[편집]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

5. 2000년대 이후[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2000년대 이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상훈[편집]

  • 1968년 4월 4등 근무공로훈장
  • 1971년 11월 월남 엽성무공훈장
  • 1981년 5.16 재단 5.16 민족상
  • 1980년 8월 무궁화 대훈장대통령 표창, 공로 표창

6.1. 서훈이 취소된 훈장[편집]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서훈취소/06.03.21)
  • 태극무공훈장 (서훈 취소/06.03.21)
  • 화랑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충무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을지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국선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천수장(서훈취소/06.03.21)
  • 보국훈장 삼일장(서훈취소/06.03.21)
  • 수교훈장 광화대장 (서훈취소/06.03.21)

6.2. 서훈 취소[편집]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을 비롯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일까지 반환은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았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두환은 6년이 지난 현재도 취소된 훈장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국무회의에 의결을 통해 환수키로 의결했지만 적극적으로 환수노력을 하지 않는 행안부를 비판했다.

7. 사망 및 조문 논란[편집]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사망하였다.[175] 향년 91세. 전두환은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중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망이후 국가장 추진 논란 및 여야 대선 후보간에 조문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서에서 화장후 북녘이 보이는 고지에 백골로 남고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구나 경남 합천은 검토 되고 있지 않고있고 본인이 생전 현충원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여야 지도부 4인과 대선 후보들 모두 조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토는 하였으나 취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전두환 사망으로 정부는 노태우와 달리 5.18 광주사태와 12.12 군사반란으로 국가장 및 현충원 안장 등 전직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되어 전두환은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유골은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되었다.

8. 논란[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평가와 비판[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평가와 비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유행어[편집]

  •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했다.
  •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했다. 한편 2004년 11월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는 29일 전두환 명의의 추가 부동산 존재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과 관련, 전두환이 허위로 재산명시를 함으로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를 검토했고, 일류국가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2005년 7월, 전두환을 법정 허위 진술죄로 검찰에 고발하였다가, 허위사실 명시는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
  • 2008년 4월 방송 인터뷰에서 겪어보지도 않고 나를 미워한다 라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의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나라도 대단히 좋은 나라가 됐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고 할 사람은(없을 것)…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찍는단 말이야. 인상 나쁘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09년 8월, 전두환은 한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전두환은 친인척이 추징금을 대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라 가족이 추징금을 대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 전두환의 재판 때 전두환이 같이 재판을 받는 노태우에게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프라이 주나?"라고 하자,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답하였고,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대답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는 어~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라고 망언한데 대해 일간베스트저장소나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는 한동안 5.18을 비하할 의도로 그의 말투가 패러디되곤 한다.

11. 여담[편집]

  •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둘 뿐인 정치 경력이 아예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나머지 한 명은 박정희이며 둘 다 장성급 장교에서 바로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과 박정희 이외의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회의원 또는 장관이나 서울특별시장 등 정치 경력이 있다.
  • 학창시절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성적을 보면 이게 과연 장교로서 가져야 할 지적수준인가 라는 게 의심될 정도로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200명의 생도 중 200등으로 입학 성적은 꼴등이었으며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인 1951년은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시점인 탓에 생도들이 계속 퇴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120등 안에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기가 막히게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항상 퇴교 위기에 몰렸으며 교관들 조차 전두환이 언제 퇴교할 건지 시기를 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지만 계속 살아남았고 육사 11기 생도들은 200명 중 156명이 소위로 임관했는데 그 중 126등을 했다.
  • 그는 대통령 재임 중 민족문화 장려정책에 따라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에는 김구의 차남 김신을 관장으로 선임했다.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7년부터 문교부를 출입하던 이유립 등의 역사가들을 계속 문교부 등에 초빙하여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사강연을 실시했다. 한편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일감정에 대해 극일(克日)정신을 주장하며 실력으로 일본을 이길 것을 강조하였다.대통령 후보 시절 7년 단임제를 주장했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재출마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재출마를 단념하고 노태우를 차기 주자로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한편 전두환은 후임자는 문민 통치자여야 된다며 1984년 경 국무총리 출신 노신영 등을 후계자로 낙점, 정치수업을 하려다가 신군부와 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의 반발로 취소하고 노태우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후계자로 잠정 낙점했던 인물은 노신영,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희도 등이 있다.
  • 전두환의 별명은 '돌' 또는 '똘'이다. 그의 머리가 유난히 빛나는 것에 대한 비꼼의 의미도 담겨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을 말할 때 우스개 삼아 '이, 윤, 박, 최, 돌, 물, 깡'이라 부른다 한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까지는 성을 그대로 부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별명이다. 즉 '전두환 = 돌', '노태우 = 물', '김영삼 = 깡'이다.
  • 역대 대통령의 식단을 보면 전두환만 유난히 고기가 많다. 축구 골키퍼 출신이라서 운동을 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양섭취를 많이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는 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2007년에 공식적으로 술을 줄였다고 미디어에서 밝혔다. 2007년 1월 5일 인사차 방문한 당시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과의 1시간 공개 면담에서 "주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12. 문서 출처[편집]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위키백과에서 참고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위키백과
[1] 역대 대통령들 중 두 번째로 장수하였다. 첫 번째는 윤보선.[1980년~1982년] [1982년] [1982년~1983년] [1983년~1985년] [1985년~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