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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출생3. 유년기4. 청년기
4.1. 운동선수4.2. 육사 생도4.3. 초기 장교
5. 5.16 지지와 월남전 참전
5.1. 5.16 군사 정변 직후5.2. 5.16 군사 혁명 지지 시가 행진 주도5.3. 3공화국5.4. 월남전 참전
6. 10•26 사태 전 후
6.1. 김재규 체포와 수사결과 발표
7. 12•12 군사 반란8.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민주화 운동

1. 개요[편집]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애 과정을 다루는 문서이다.

2. 출생[편집]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5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형 열환(1914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4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6년생), 남동생 석환(1941년생), 경환(1946년생)이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췄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고 전두환이 9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지냈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3. 유년기[편집]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다. 5세 되던 해 그의 가정은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7세 되던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10대 초반인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기도 했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1941년 4월 다시 가족과 함께 남행열차를 타고 귀국하여 대구로 내려와 바로 희도국민학교에 복학하여 1944년 3월 25일 14세에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1년 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생이 된 전두환은 권투를 시작했고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킬로미터 거리였지만 그는 왕복 20km의 길을 직접 걸어서 통학하였다.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생 당시 별명이 몽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그는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학교 동창이던 백순달은 그가 걸어서 다녔다고 하였다.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는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0년 2월 10일에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형 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학하지 않았고,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다. 200명 선발에 2,400명이 몰렸는데 합격,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4. 청년기[편집]

4.1. 운동선수[편집]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은 교번 152번으로 교육연대 2중대 2구대에 소속되었다. 육사 1학년 여름에 비상이 걸려 M1소총을 들고 완전 군장을 갖추고 24km를 구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장교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판정되어 유급 조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마진터널)을 거쳐 창원군 상남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진해로 돌아오는 60리의 구보였다. 몇몇 생도들이 쓰려졌다. 이때 전두환은 한손으로는 한 동료의 옆구리를 잡아 이끌고 또 한손으로는 그의 M1 소총과 (배낭)을 움켜쥐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미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성적은 하위였지만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축구부원이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축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1983년 5월 K리그 개막 경기에 직접 참관을 비롯하여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서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21]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운동선수라는 이력과는 별개로 전두환은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전두환은 대구공업고등학교시절부터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4.2. 육사 생도[편집]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 정호용 등과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친구이며 이는 군생활과 정계진출 내내 그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평생동안 친구로 지내게 된다. 한가지 특이사항이라면 전두환이 지나갔던 이력의 상당부분을 노태우가 따라갔고 심지어는 전두환의 후임 대통령이 노태우가 되었다.

1955년 3월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임관 성적은 156명 중 126등으로 81% 수준이었는데 이는 공부를 매우 못한 것에 속한다. 참고로 전두환과 동기인 육사 11기 중 임관성적 1등은 김성진 소위로 김성진 소위는 전투지휘관의 길이 아닌 육군사관학교 교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졸업성적에 의해 진로가 결정되는데 웃기게도 성적우수자들은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가게 되고 성적열등자들이 되려 전투지휘관이 되는 진로를 선택했다. 육사 생도 시절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가장 돈이 많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집에 살았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하였다.

4.3. 초기 장교[편집]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 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4년 동안의 생도시절에 나는 축구와 권투를 한 탓인지 학과성적이 좀 뒤진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관들의 기대를 그리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입니다." 라고 말을 하였다. 초군반 수료를 마치고 육군 제 21보병사단으로 배속되었다. 1956년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7년 10월에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로 전속되고, 그 후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이 되었다. 1958년 육군 대위로 진급하였다.

1959년 1월 3일 육군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4월 20일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59년 5월에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로 배속되었다가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 6월 12일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 유학을 갔다. 통역장교를 포함한 총 5명의 대한민국 육군장교들이 같이 유학 갔고 노태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에도 역시 다른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에 입교하여 1960년 6월에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뒤이어 1960년 6월 25일 미국 육군보병학교의 유격훈련 교관교육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수전학교 과정에는 노태우를 비롯한 4인의 한국 장교들과, 레인저 스쿨 과정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5인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지만, 이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으로서는 홀로 교육받았다. 영어에 서툴렀지만 통과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0년 12월 16일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과장으로 보임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초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되고, 4월 10일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로 발탁되었다. 그곳에서 1개월가량 근무하다가 예비장교훈련단(ROTC) 창단을 서두를 때 예비장교훈련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그 예비장교 훈련단 참모장 이명재 소장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담당 교관요원이 되었다. 이어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5. 5.16 지지와 월남전 참전[편집]

5.1. 5.16 군사 정변 직후[편집]

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혁명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5·16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 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 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23]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전두환은 그 사실을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 등의 지원 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육사 교장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출세가도의 기반을 마련한다.

오치성, 박창암 등은 육사를 '혁명대열'에 끌어넣는 것이 이들의 긴급 임무였다.[23] 박정희는 이들을 급히 육군사관학교로 파견하였다. 쿠데타 군 측에서 온 오치성과 차지철은 육사 간부장교들과 생도대표에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도대표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학교 지휘계통은 육본을 장악한 혁명위원회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북극성 동창회의 선배들과 상의하겠다.”

또한 생도대표들과 북극성회 간부들이 가진 시국대책회의에서는 쿠데타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북극성회는 육사 11기 이후 졸업생이 참여하는 순수한 동창회였다. 주로 성적우수 졸업자들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간부를 맡았다.[23] 전두환 등의 하나회계는 성적우수자가 없었으며 교수요원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러나 교수부 동기생들을 통해 북극성회와 생도대표들의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이상훈(육사11기, 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 역임) 등과 함께 정규육사 출신들이 모여 박정희 주도의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 등은 육군본부로 가 육본에 설치된 군사혁명위 본부에 들어가다가 김종필과 마주쳤다. 전두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 전두환 : 이렇게 중대한 일을 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아무 연락도 안 했습니까.
  • 김종필 : 비밀 유지도 어려웠고 서두르다 보니 다 연락하지 못하고 빼 먹은 데가 생긴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부터 협력하라.
  • 전두환 : 그렇잖아도 지금 막 저희 동기생들이 모여 육사 동창생들은 이번 군사혁명에 적극 함께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 김종필 : 아, 그런가, 잘 됐다.
  • 전두환 :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한데, 잘 안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맡아 해 보겠습니다.
  • 김종필 : 좋다. 차량 등을 지원하라고 할 테니까, 성공시켜 봐라.

5월 17일 자정 전두환 등은 그날 밤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로 갔다. 그러나 육사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반대 분위기였고 더구나 강영훈 교장이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린 상태였다.

5.2. 5.16 군사 혁명 지지 시가 행진 주도[편집]

그런데 5월 17일 저녁 육사 교장 강영훈이 육군본부로 간 것을 알고 전두환은 뒤쫓아 갔다. 육본의 쿠데타 본부에서 강영훈은 장도영과 박정희로부터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독촉받는다. 그러나 강영훈은 "생도들 중에도 찬반이 갈려 있어서 어렵다"면서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폈다.

이때 전두환은 막 육본에 도착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주모자들인 박창암· 박치옥 대령에게 "강영훈 교장이 육사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가 방해받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박창암, 박치옥에게 보고한 것은 그때까지 들었던 강영훈의 상황 설명과 딴판이었다. 강경파로 후에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던 박창임은 강영훈과 전두환을 대질시키자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반혁명으로 찍히기 전의 고위장성과 새파란 대위급 장교를 대질시키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쿠데타의 최고지도자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게 물었다.
  • 장도영 : 너희들, 육사쪽이랑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 전두환 : 각하, 저희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저희 육사출신 장교들과 생도들은 군사혁명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때 안에서 강영훈과 면담하던 박정희가 나왔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지시했다.[23] 박정희는 즉석에서 "강영훈 교장의 얘기가 전두환 대위랑 이 사람들과 달라요. 강 교장을 조치하시오."라고 하고 전두환 등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창암은 즉각 강영훈을 구금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도 이한림의 '쿠데타 묵인'소식이 들려왔다.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북극성회 간부들은 쿠데타 반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장교단과 함께 교문을 나서 동대문으로 향했다. 생도 800여 명과 육사 소속 장교 및 졸업생 2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소공동과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23] 육사생도 시위대의 직각보행을 본 서울 시민들은 구경하다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것으로 쿠데타가 국민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비쳐졌다.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의 각종 주한 기관들, 즉 대사관과 8군과 CIA가 '민심 우호적'이라는 보고서들을 띄웠다.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권위적인 태도로 권력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해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였다.

1961년 5월 21일 군사혁명위원회 민원담당비서관으로 차출되었고, 6월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그는 9월 13일 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에 다시 발탁되었다. 현역 육군 대위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과 동시에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을 겸직하였다. 그해 11월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장이 되었다가 12월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으로 보직변경되었다.

1962년 12월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전두환 대위를 불러들였다. 전두환은 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물 포섭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 박정희 :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 전두환 : 제가 어찌 국회의원을 하겠습니까.
  • 박정희 : 이봐, 국회의원이 뭐 별거야.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
  • 전두환 : 예 각하, 일단은 군에 있는 게 좋습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그는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계속 사양하였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상의한 사람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던 윤필용이었다. 그는 윤필용에게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의장 각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다시 전두환을 불렀다.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라는 전두환의 이 말이 박정희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전두환을 위해서 하나회를 창설해 줬으며 전두환을 하나회 회장으로 임명하고 전두환의 휘하에는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는 물론이고 전두환의 상급자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등을 추가시켰다.

5.3. 3공화국[편집]

그 후 전두환은 육군 중령으로 승진, 1963년 1월 7일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을 거쳐, 1963년 9월 15일 육본 인사참모부로 전속되었다. 1964년 7월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27일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1966년 8월 11일에는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에 임명되고, 1967년 8월 11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서독 시찰 중 아버지 전상우의 부음을 접한다. 1968년 1월 귀국 후 다시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했지만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대리를 지냈다.[28] 1969년 4월 14일, 전두환 중령은 육사11기 이후의 동창회인 북극성회(北極星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일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되었다.

5.4. 월남전 참전[편집]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되어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다. 1971년 1월 30일 박쥐 25호 공수낙하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 수색을 하였으나 병사는 찾지 못했는데, 기적적으로 이 병사는 홀로 살아서 돌아왔다. 2월 2일부터 2월 20일까지는 쑤이까이 및 망망 계곡에 숨어있는 베트콩을 섬멸하였다. 3월 7일 29연대 3대대의 12중대 중대원 176명 가운데 한꺼번에 9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나 부상당하여 후퇴하였다. 우기(雨期) 중인 6월 22일 박쥐26호 작전을 개시하여 베트콩 2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13문, 수류탄 42개, 실탄 2191개, 포탄 31개등을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노획이라 보고해 전두환 대령은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1년 화랑, 충무, 을지무공훈장 등 3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파병기간 중 패전도 없었는데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은 크게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업무를 전부 회식으로 도배하거나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 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11월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일본에서 3대오물로 유명한)츠지 마사노부라는 일본군 대위가 있었다. 그는 동남아 일대를 돌며 나쁜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어, 돌아다닌 나라의 지형과 풍속을 그는 소상이 머리에 넣고 왔지, 전쟁이 일어나자 그 대위의 정보만으로 일본은 초기의 태평양전쟁을 수유히 수행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왔다.

6. 10•26 사태 전 후[편집]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1]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31]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1979년 10월 27일 비상 사태에 의한 혼란 중에 전두환은 당시 육참총장 정승화의 지시를 받아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군내 인맥을 동원, 중정 요원들과 격투끝에 이들을 제압시키고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체포전에 돌입한다. 10월 27일 오후, 그는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흥주(현역 대령, 중정부장 비서관), 박선호(前 해병대 대령, 중정 의전과장)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했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어 그는 언론에 수시로 브리핑을 하며 수사 결과, 취조 과정을 공개하였다.

6.1. 김재규 체포와 수사결과 발표[편집]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에게도 사정을 양해했다고 한다. 김항규에 의하면 "전두환 장군은 "나는 군 선배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찾아와도 형님은 살릴 수 없다."고 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7. 12•12 군사 반란[2][편집]

12월 6일 전두환은 육군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 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한때 하나회 회장이었던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나 그 고문이었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은 하나회의 리더 격인 전두환에게 풍부한 활동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전두환은 이 자금을 혼자 착복하지 않고 다시 회원들에게 통크게 배분했다.(지동욱, <한국대통령열전>, 주코 신서(일본), 2002) 이런 태도가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함께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34]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35]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35]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35] 12월 13일 전두환은 지시를 내려 정승화,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를 체포, 연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등이 부상을 당하고,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의 부관 김오랑 소령(당시 소령, 사후 중령 추서)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승화와 정병주는 즉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8.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민주화 운동[편집]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두환은 사전연행계획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 김대중 체포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이에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하여 진압했고 이로 인해 사태가 확산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국회에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해, 오전 10시에 개회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가 무산됐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됐다.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3]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1] 10·26 사건 또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朴正熙大統領被擊事件), 궁정동 사건(宮井洞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및 안가 경비원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량운행계장 등을 살해한 사건[2] 12·12 군사 반란(12·12 軍事 反亂) 또는 12·12 숙군 쿠데타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3]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