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46 vs r47 | ||
|---|---|---|
| 1 | [[분류:조선]] [[분류:과거의 국가]] | |
| 2 | 1 | ||<-3><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c00d45><tablebgcolor=#fff,#1f2023><bgcolor=#c00d45> {{{#ffd800 {{{+1 '''조선'''}}}}}}[br]{{{#ffd800 '''朝鮮'''}}} || |
| 3 | 2 | ||<-2><width=50%><rowbgcolor=#f0f0f0,#1f2023><height=150> [[멕시코의 국기|[[파일:조선 국기.png|width=70%]]]] ||<width=50%><height=150> [[파일:조선 왕실 어기.png|width=79%]] || |
| 4 | 3 | ||<-2><rowbgcolor=#c00d45> {{{#ffd800 '''국기'''}}} || {{{#ffd800 '''왕실 어기'''}}} || |
| ... | ... | |
| 23 | 22 | [clearfix] |
| 24 | 23 | == 개요 == |
| 25 | 24 | 조선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
| 25 | ||
| 26 | 26 | == 상세 == |
| 27 | 27 | 조선은 1392년 [[태조(조선)|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 |
| 28 | 28 | |
| ... | ... | |
| 39 | 39 | 조선의 문화는 여러 이웃 문화의 수용과 독창적인 발전이 교차되며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전통 문화로 손꼽히는 한옥, 한복, 한식 등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완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
| 40 | 40 | |
| 41 | 41 | 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그 사이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팎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또는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에 대한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략적으로 건국 및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 - 16세기 초반 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 - 17세기를 중기로 보며, 18세기 초 - 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본다. |
| 42 | ||
| 42 | 43 | == 건국과 국호 == |
| 43 | 44 | 이성계를 중심으로 권력을 잡은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국왕을 교체하고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원래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계속 고려로 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고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였다. 국호의 결정은 고조선을 근거로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에서 유래한 화령을 후보로 세우고 명나라에서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것은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국왕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형태로 재위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세습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제도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였다. |
| 44 | 45 | |
| 45 | 46 |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의 홍무제가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내부에서는 왕자의 난과 같은 분열과 두문불출과 같은 일부 사대부의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을 다독여야 하였다. 조선은 외교에서는 명과의 사대를 강화하고 내부에서는 왕권의 확립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였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영락제의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민본 사상과 천명을 앞세워 새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였다. |
| 46 | 47 | |
| 47 | 48 |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38]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은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사용되었다. 한편 이씨 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조(李鮮)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 정리 사업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용어를 별다른 비판없이 사용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
| 49 | ||
| 48 | 50 | == 국체 및 이념 == |
| 49 | 51 | 조선은 전제군주적인 국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왕국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관료제로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점차 새로운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고 경국대전을 통하여 이를 명문화하였다. 성리학은 유학의 한 갈래로 송나라 시기 형성되어 한국에 전해졌다. 성립 시기 성리학은 양명학, 훈고학 등의 다른 유학 갈래들과 경쟁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을 참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학의 다른 유파들은 배격하였다. |
| 50 | 52 | |
| 51 | 53 | 성리학이 독점하는 국가 이념의 수립은 이후 조선 내의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파가 형성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 학파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었고 학파의 수장으로서 자리잡은 유학자는 비록 현직 관료로 있지 않더라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생각하였으나 그들 역시 성리학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편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는 서학이나 동학과 같은 움직임은 사문난적으로 배격되었다. |
| 54 | ||
| 52 | 55 | == 역사 == |
| 53 | 56 | 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
| 54 | 57 | |
| ... | ... | |
| 81 | 84 | 조선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실학의 연구, 서학의 수용, 동학의 수립 등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해법을 찾지 못하다가 동학 농민 혁명으로 표출되었으나 외세가 개입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외부적인 문제인 서양의 접근에 대해서도 척화비를 세우며 강경하게 거부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론과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주장한 개화파의 갈등은 자주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통해 강압적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위정척사파의 등장과 외세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
| 82 | 85 | |
| 83 | 86 | 안팍의 어려움이 쌓인 가운데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조선의 역사는 [[대한제국]]으로 승계되었다. |
| 87 | ||
| 84 | 88 | == [[조선/정치|정치]] == |
| 85 | 89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정치)] |
| 90 | ||
| 86 | 91 | == [[조선군|군사]] == |
| 87 | 92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군)] |
| 93 | ||
| 88 | 94 | == 경제 == |
| 89 | 95 | 조선의 경제는 농업 중심의 자급적 지역 경제를 기반으로 한 가운데 개인 간의 호혜를 바탕으로한 선물과 부조, 국가의 조세 수취와 자원의 공적 분배와 함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업 경제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 왕조인 고려가 국제 무역을 비롯한 상업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점과 비교된다. |
| 90 | 96 | |
| ... | ... | |
| 97 | 103 | 조선은 상업 활동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품목은 육의전 등의 시전을 통해서만 공급되었고 사사로이 장사를 하는 난전은 금난전권으로 금지되었다. 금난전권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다가 정조 시기 신해통공으로 폐지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국제 무역은 중국과의 거래는 사신 행차와 함께 동행하는 공무역이 주를 이루고 일본과의 거래는 왜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역관과 같은 관리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공식적 무역 거래는 크게 감소하였고 중국과는 공무역 이외에도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경상, 송상, 만상과 같은 상인 조직이 출현한다. |
| 98 | 104 | |
| 99 | 105 | 조선은 상업의 비교적 늦은 발달과 현물화폐 사용의 일상화로 주화 역시 후기에 들어서야 일반화 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화폐 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주화를 제작할 구리가 부족한 이유가 컸다. 이러한 문제는 일본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이 개발되어 조선의 구리 수입이 원활해진 뒤에야 해결되었다. 숙종 이후 발행된 상평통보는 조선의 대표적 화폐가 되었다. |
| 106 | ||
| 100 | 107 | == [[조선/교통|교통]] == |
| 101 | 108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교통)] |
| 109 | ||
| 102 | 110 | == 사회 == |
| 103 | 111 | 조선은 왕족, 양인, 천민의 구분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조선의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 실제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다. 조선의 신분제는 세부 신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없고 각자가 맡은 직업인 직역이 고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란 점에서 이웃한 일본의 신분제와 달랐고, 실제로 별다른 신분의 구분이 없던 중국의 제도와도 달랐다. 조선의 신분제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
| 104 | 112 | |
| 105 | 113 | 양반은 세대를 거듭하여 관료를 담당함으로써 스스로 특권화된 계층으로 혼인, 학연 등을 기반으로 다른 계층과 구분되는 사회 계급을 형성하였다. 중인은 지방의 향리를 비롯하여 의원, 역관 등의 기술직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이들의 신분 상승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양인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였으며 각종 세금의 징수, 국가 노역의 동원, 병역의 부담 등을 떠안았다. 조선의 천민은 전대인 고려 시기의 향, 소, 부곡 등의 경우와 달리 지역 전체가 천민으로 지정되는 경우는 없었으나 여전히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관청에 소속된 관노나 개인의 종으로 부려진 사노비와 같은 노비, 백정과 같은 특수한 직업을 지닌 사람, 남사당과 같은 재인 등이 천민에 속했다. 이러한 신분의 구분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 사회의 차별은 20세기 초까지도 남아있었다. |
| 106 | 114 | |
| 107 | 115 | 결혼과 가족의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으나 재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은 개인 간의 결합이라기 보다 가문의 결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아내는 오직 한 명만이 인정되었고 중혼할 경우 처벌받았지만, 첩의 경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양반의 경우 결혼은 인생의 주요 통과의례인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였고 가문이 결정한 바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첩을 들이는 것은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처가 새로 들인 천민 출신의 첩을 살해하는 등 양반 여성의 저항도 상당하였으나 중기인 중종 시기 국가의 강력한 개입으로 이러한 행위가 처벌되면서 처의 반발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 116 | ||
| 108 | 117 | == 문화 == |
| 109 | 118 | 문화는 한 사회의 생활 양식 전반을 일컫는 개념으로 조선 역시 의식주를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문화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로 계속하여 서로 교류하여 상당한 문화적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각자 독자적인 발전을 통한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
| 110 | 119 | |
| ... | ... | |
| 113 | 122 | 사회적 관계의 변화나 경제의 변화 역시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시를 짓고 문집을 만드는 일은 조선 초기 및 중기까지 주로 양반의 문화였지만, 후기에 들면 양민들이나 천민들도 문학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서당이 일반화되면서 서민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확산되었고, 한글 소설 등이 널리 유행하면서 독자층도 늘었기 때문이다. 탈춤, 판소리와 같은 새로운 문화는 서민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여 양반들의 것과는 다른 서민들의 바램을 담고 있었다. |
| 114 | 123 | |
| 115 | 124 | 조선은 각종 절기와 명절에 따른 세시풍속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의 절기에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다. 이 가운데 몇몇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인의 주요 풍속으로 남아있다. |
| 125 | ||
| 116 | 126 | == 문서 출처 == |
| 117 | 127 |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 |
| 118 | 128 | |
| 119 | 129 | * [[https://ko.m.wikipedia.org/wiki/%EC%A1%B0%EC%84%A0|위키백과]] |
| 130 | ||
| 131 | [[분류:조선]][[분류:과거의 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