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9 vs r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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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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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에 임명되고 판병조사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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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의정 해임과 군사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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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년(성종 7년), 자신에 대한 탄핵과 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했지만, 성종은 만류하다가 음력 3월 29일 사직을 받아들여 좌의정직에서 해임했다. 이후에도 부원군이자 국가 원로로서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유자광과 언관들의 공격도 계속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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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년(성종 9년) 성종은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학문 연구 장려를 위해 연로함과 덕망을 두루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경 왕사로 임명하여 국정을 자문함과 동시에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제안을 하자 그는 정인지를 적극 추천하여 삼로로 선정되게 하였다. 그러나 정인지를 왕사로 추대하기 직전에 대간으로부터 "한미한 가문에서 자수성가하여 기신하였으나 식화에 전념하여 재산을 치부하였으니 존경할만한 인물로는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그러자 한명회 등의 대신들은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에 불과하였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정인지를 왕사로 추대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으나 결국 사림파들의 맹렬한 반대로 정인지는 왕사로 추대되지 못하고 그해 11월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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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후궁 출신 왕비인 폐비 윤씨 폐출 사건(1479.6)에 참여하였는데, 후일 부관참시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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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년(성종 10년) 늦가을 명나라에서 건주위 여진족을 치려고 조선에 후원을 요청하여 어유소에게 군병을 거느리고 참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고 폭설이 쌓이어 길은 험하여 결국 지원군을 퇴각시켜 되돌아왔다. 그러나 명나라에 관계된 문제이니 병력을 다시 보내야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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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다시 군신회의를 소집하자 재상들은 모두 추위와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한명회는 그래도 파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녕만 도모하기 때문이고, 노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입니다. 군왕의 적개에도 의당 급히 서둘러야지 늦출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라며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논의가 계속되다가 그의 뜻이 관철되어 성종은 의정부좌의정 윤필상에게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여 다시 군사를 파병,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성종은 '경의 강한 계책 덕에 거병하여 성공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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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장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조종조에 압록강 연안에 위아래로 장성을 쌓으려고 하다가 일이 커서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다시 그 일을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성종은 의정부좌의정 홍응을 파견하여 성곽의 수축, 개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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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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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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