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7 vs r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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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49 | 한명회의 독려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날 사병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매복시키고, 그날 저녁 한성부를 점령하였다. 홍윤성과 홍달손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류,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 일파를 제거하였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막강한 권력에 반발하는 뜻에서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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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51 | 이어 한명회는 모사가들을 시켜 잔존 세력을 숙청한 후, 직접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등과 황보인 일족을 참살케 한 후 군기녹사·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 1등관이 되었다. |
| 52 | === [[세 | |
| 52 | === [[세조찬위]] === | |
| 53 | 53 | 1456년([[세조(조선)|세조]] 2) 2월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한명회는,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김문기, 하위지 등을 의심하고 이들의 출입을 차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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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55 |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 윤봉을 보내서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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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59 | 1456년 초부터 그는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는데, 그해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의 가담자들을 폭로함으로써 성삼문, 하위지, 김문기 등을 체포하였다. 바로 이들을 국문한 후 처형하고,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사육신이 사형된 후 사육신의 의거를 진압한 공로로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도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이조판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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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61 | 셋째 딸을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출가시켰으나, 셋째 딸은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는 산욕으로 요절한다. 외손자 인성대군 마저 요절하면서 한명회는 해양대군과는 다소 껄끄러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해양대군이 곧 예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
| 62 | === 정치 활동과 권력 강화 === | |
| 63 | 1463년 4도 순찰의 명을 받고 평안도, 강원도, 함길도, 황해도를 순찰하였다. 그가 순행을 갈 때 특별히 세자가 나와서 그를 전송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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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이었으나 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수빈 한씨에게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명회는 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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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권람은 일찍 요절한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다시 사위이기도 한 성종의 후궁 소생 서녀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관계를 형성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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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혈과 그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자을산군을 추대하여 성종으로 등극시키게 된다. 또한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이라는 크나큰 인사 폐단을 낳아 조선왕조의 기강을 흐트러 놓는 원인이 되었다. | |
| 62 | 70 | == 군사 활동 == |
| 71 | 변방 수비와 국방 활동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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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고,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56년부터 [[단종(조선)|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에 들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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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1458년 봄에 귀국,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3도에 흉년이 들어, 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 순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싣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하고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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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 또한 병조판서 재직 중 평안도와 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북변을 수습한 뒤, 북방에 축성하여 방어를 확실히 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숭록대부가 되었고, 1458년(세조 3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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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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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에 임명되고 판병조사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 |
| 63 | 82 | == 본 문서 정보 == |
| 64 | 83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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