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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24 | 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 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73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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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여 처음에는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안장되었으나, 곧 [[충청남도]] | |
| 26 | 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여 처음에는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안장되었으나, 곧 [[충청남도]] 천안군(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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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28 |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88년(성종 19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산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 뒤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하여 연산군 대에 와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되어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그의 부관참시를 하던 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자 병사들이 그의 부관참시 집행을 주저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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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4 | 둘째 딸 공예왕후 사후 폐비 윤씨가 폐출된 뒤,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 된 정현왕후는 한명회의 고모부 윤곤의 증손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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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36 | 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 |
| 37 | == 평가 == | |
| 38 | 성종때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찬위|세조 반정]]을 주도한 점이 집중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 |
| 39 | == 의혹 == | |
| 40 | 왕조실록에 의하면 밀양 사는 박씨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억지로 이혼시키고 조카의 아내가 되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세조조에 한명회가 한언의 숙부로 밀양 사는 박씨가 재산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세조에게 청하여 전부와 이이하게 하고 언의 아내로 삼았는데, 성종조에 이르러 무릇 재가한 사족은 청현직에 서용하지 않게 되자, 홍윤이 형조의 낭관이 되어 대간의 논박을 받고 체직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변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
| 37 | 41 | == 본 문서 정보 == |
| 38 | 42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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