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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22 | 야사에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한다.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도끼로 자신의 정강이 또는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 찍었다고 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했는데, 그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을, 그의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하였고 셋째 딸은 예종의 정비(장순왕후)가, 막내딸은 성종의 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으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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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24 | 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 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73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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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여 처음에는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안장되었으나, 곧 [[충청남도]] [[천안시|천안군]](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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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88년(성종 19년)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산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 뒤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하여 연산군 대에 와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되어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그의 부관참시를 하던 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자 병사들이 그의 부관참시 집행을 주저했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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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관되고, 1507년(중종 1년) 10월 예관을 보내 재장사한 뒤 세조의 묘정에 다시 배향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의 충성사 등에 제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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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묘비문은 동문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한 서거정이 찬하였다. 생전에는 활달하고 호쾌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인정되었으나 세조 말기부터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세조 이후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그는 '간신'으로 격하되었으며, 그는 가장 '위대했던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그에 대한 전기와 전설, 작품 등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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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둘째 딸 공예왕후 사후 폐비 윤씨가 폐출된 뒤,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 된 정현왕후는 한명회의 고모부 윤곤의 증손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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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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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3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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