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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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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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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생애|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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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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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성종 1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이 또 다시 왔다'면서 금전과 채단을 선물하였다. 이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한문을 권하였고 1485년(성종 15년)에 병을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종에게서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로 하사 받았다. 그러나 1485년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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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한다.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도끼로 자신의 정강이 또는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 찍었다고 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했는데, 그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을, 그의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하였고 셋째 딸은 예종의 정비(장순왕후)가, 막내딸은 성종의 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으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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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 하였다. 그해 음력 11월 14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향년 7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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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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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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