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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29 | 홍범도는 숙부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살다 부잣집 머슴살이하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83년 15살이 되던해 머슴살이를 청산하고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가 되었다. 1886년, 부대 내 차별과 폭행이 심한 분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이후 도주한 뒤, 군대 동료의 말을 떠올려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3년 동안이나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자 결국 공장 주인과 크게 다투고 제지공장을 떠났다. 이후 1890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지담의 상좌승으로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 스님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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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신계사 생활 1년이 지난 어느 무렵 근처 암자에서 지내는 젊은 비구니를 알게 됐다.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 |
| 31 | 신계사 생활 1년이 지난 어느 무렵 근처 암자에서 지내는 젊은 비구니를 알게 됐다.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근처 절에 있는 비구니이었던 단양 이씨(이옥구 또는 이옥녀)와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후 함께 환속하여 처가가 있던 함경북도 북청에 향했다. 도중에 건달패들에 의해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는 간신히 풀려나 천신만고 끝에 고향 북청에 갈 수 있었고, 홍범도는 그녀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포수라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밑천을 다 털어 총을 구매해 사냥꾼 생활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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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33 | 1895년 1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시기에 강원도 회양군에서 포수였던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4명의 의병 부대를 조직한 후, 의병대장 유인석을 만나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동지였던 김수협이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의병들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유인석과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체하고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 노동자로 은신했지만 일본군의 감시가 끊이지 않아 함경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자루를 빼았고, 황해도 지경산을 거쳐 도착한 함경도 덕원에서 덕원읍에 탐관오리였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하여 금품을 빼았아 나눠주고 1897년 함경남도 북청에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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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41 | 키질로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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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43 | 1943년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후 키질로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93년에 [[북한]]은 홍범도가 [[평양시|평양]]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봉환 시도를 하였지만,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적이 있었다.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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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2005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 |
| 44 | 46 | == 경력 == |
| 45 | 47 | * 평양 감영 우영 제1대 소속 나팔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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