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고려(r4 판)

[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고려
高麗 | Goryeo (Koryŏ)
파일:고려 국기.png
파일:고려 국세.png
국기
918년~1392년
(474년 19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국가 정보
국가명
고려
수도
개경 (919-1232, 1270-1382, 1383-1390, 1391-1392)
철원 (918-919)
강도 (1232-1270)
남경 (1382-1383, 1390-1391)
건국일
918년
멸망 및 정권교체
1392년 8월 5일 (멸망 후 조선으로 정권교체)
언어
중세 한국어, 한문
인구
3,070,000명 (1000년도 기준)
현재 국가
정치
정치체제
태조 (재임기간 : 918년 ~ 943년)
광종 (재임기간 : 949년 ~ 975년)
성종 (재임기간 : 981년 ~ 997년)
현종 (재임기간 : 992년 ~ 1031년)
문종 (재임기간 : 1046년 ~ 1083년)
의종 (재임기간 : 1146년 ~ 1170년)
고종 (재임기간 : 1213년 ~ 1259년)
원종 (재임기간 : 1259년 ~ 1274년)
충렬왕 (재임기간 : 1274년 ~ 1308년)
공민왕 (재임기간 : 1351년 ~ 1374년)
공양왕 (재임기간 : 1389년 ~ 1392년)
최승로 (재임기간 : 988년)
강감찬 (재임기간 : 1030년)
윤관 (재임기간 : 1108년 ~ 1109년)
이제현 (재임기간 : 1356년 ~ 1357년)
이인임 (재임기간 : 1381년 ~ 1382년)
최영 (재임기간 : 1388년)
정몽주 (재임기간 : 1390년 ~ 1392년)
개성 왕씨
1. 개요2. 상세3. 국호4. 고려의 성립5. 고려의 멸망6. 인문환경7. 정치8. 통치 기구
8.1. 중앙 관제8.2. 지방 행정
9. 경제
9.1. 대송 무역9.2. 대원 무역
10. 군사11.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고려는 918년 왕건이 건국한 이후, 1392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2. 상세[편집]

통일신라 하대에 송악(현재의 개성특별시)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였으며, 919년에 송악을 개경이라 이름을 고치고 수도로 삼았다. 그 뒤, 935년 신라, 936년 후백제를 차례대로 복속하였다.

광종은 황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을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시무28조). 수도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서 송, 일본, 아바스 칼리파국,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했다. 유목제국인 요, 금과의 대립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고려-요-북송 / 고려-금-남송 3강 구도의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집권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로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의 폭정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은 전성기에 비해 크게 쇠퇴하게 된다.

국력이 매우 쇠약해진 상황에서 13세기 몽골제국의 침략에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30년 동안 항쟁했으나,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결국 부마국으로 전락하면서[2] 국운이 기울게 되고,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내우외환에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이성계는 배극렴을 비롯한 새 왕조 개국 세력을 앞세워 왕대비 안씨에게 공양왕 폐위 및 새 왕조 개창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고, 결국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면서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고, 1393년에 고려라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면서 고려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3. 국호[편집]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를 건국하면서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다. 고려는 동명성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하자는 뜻으로 정한 국호이다. 고구려의 경우 장수왕 이후의 정식 국호는 고려였다. 원래 궁예가 건국한 나라 이름도 고려였으나 3년만에 버리고 이후 마진을 거쳐 태봉으로 변경되었다. 왕건은 역성혁명을 통해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을 멸망시키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서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했다.

4. 고려의 성립[편집]

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신라 진골 왕족이었던 궁예와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이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이 먼저 후백제를 자칭했고, 곧 궁예가 태봉을 세웠다. 이로써 신라, 태봉, 후백제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이후 궁예가 국호를 계속 바꾸고 무리한 천도를 하는 등 민심을 잃게 되자 이에 918년 통일신라 송악 지방의 유망한 신라 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인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을 멸망시킨 후,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919년 태봉의 초기 수도이자 자신의 고향인 송악(개성)으로 천도했다. 그 측근 혹은 본인이 고구려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고려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데에는 왕건과 초창기의 궁예나 다름이 없었다. 한편 926년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발해의 왕족을 비롯한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다. 이는 왕건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확고히하면서 신라 호족으로서의 성격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대외 정책에서도 궁예와는 달리 친(親)신라 정책을 썼다. 이는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왕건은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금성(金城) 북(北) 50리의 땅에 신광진(神光鎭)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하게 하였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신라의 고려 귀순을 결정했고, 936년에 신라 군사와 함께 후백제를 패망시킴으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5. 고려의 멸망[편집]

이성계 일파의 집권 후 신흥 사대부들은 권문세가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 등을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사전(私田)개혁을 추진하였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반발도 적지는 않았다. 폐위된 우왕의 아들 창왕이 이성계 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나마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만큼 구세력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계 일파가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자(1389), 정치는 완전히 신진 사대부가 주도하였다.

또한 사전 개혁도 본격화되었다.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이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 완료되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이 모두 불태워졌다. 사전 개혁으로 국가의 세수(稅收) 대상 토지가 확보됨으로써 국가 재정이 확충되고, 관료들에게도 경제적 급부로서 과전(科田)이 지급될 수 있었다. 공양왕 3년 전시과제도와 마찬가지로 수조지인 과전을 분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시과제도 그대로 복구된 것은 아니었으니, 과전법의 수조지 분급 대상 지역은 경기지역에 한정되도록 축소되었고, 분급 대상도 대체로 현직 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러한 수조지 제도의 대폭적인 축소는 소유권에 의한 토지 지배가 확대되고 수조권에 의한 토지 지배가 축소·쇠퇴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와 사상 등의 면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개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가 온건한 개량을 주장하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파를 꺾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국가 사회로서는 연속성을 가졌던 것이었으니, 왕조만이 아닌 기존 국가 사회 자체가 멸망하여 영토와 국민이 크게 변동하였던 앞 시대의 삼국에서 신라·발해로의 변화나, 남북국 시대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왕조의 변화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왕실과 왕조로서는 종말과 새로운 개창이었으나, 영토와 국민으로서는 연속이었으며, 고려 말 당시 국가 체제 안에 포괄된 지배층 내에서의 정권교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권 교체의 이면에서는 고려 후기 이후 광범한 사회 변동 속에서 암중모색되던 개혁이 확고한 방향을 잡고 새로운 체제를 구체화시키는 결실을 보고 있었다.

6. 인문환경[편집]

고려사회는 신분 사회로서 중인, 평민, 천민, 양반 관료 등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제도를 두어 영국의 귀족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다. 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 소, 부곡민, 화척, 재인 등이 있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재혼녀도 고려의 왕비가 될 수 있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재혼이 악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유산은 남녀가 균등하게 상속받았으나 여성은 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고려의 교통 인프라에서 비중은 육로교통보다 수로와 해로교통이 크게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전 국토에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이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수로와 관련이 있는 진(津) · 도(나루터) 등에 세력가들이 크게 번영하였다.

고려는 통일신라와 달리, 조세를 수도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더욱 도로체계가 정비된다. 도로 가운데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로에는 역이 두어졌고, 교량으로 이어지지 않는 하천에는 진이 설치되어서, 전국적인 도로망은 진에 의하여 보완되는 역로(驛路)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고려 후기가 되면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며 발전되었던 도로체계는 무너진다.

7. 정치[편집]

광종(光宗)이 죽자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 중앙 귀족이었던 최승로(崔承老)였다.

신라 최승로의 정치 이념은 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귀순할 때 고려의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호족과는 달리 지방에 자기의 근거지를 갖고 있지 않은 학자였다. 이것은 자연히 그의 정치적 견해를 집권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고 유교의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니 그가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時務) 28조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종은 광종의 개혁이 실패한 뒤의 정치적 수습을 이 유학자들의 견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직(鄕職) 개혁을 실시하여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한편 호족들은 되도록 중앙귀족으로 흡수하려고 하였으며, 고전과 유교에 밝은 귀족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치에 반영시키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귀족 정치의 터전이 잡혀가고 있었다.

고려는 신라가 귀족인 진골 중심의 정치(성골인 왕족은 수가 적었다 그 증거로는 2명의 여왕이 나왔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이성(異姓) 귀족들에 의해 정치를 해 나갔고, 이 이성 귀족들은 자기의 출신지를 중요시하였다. 즉, 본관(本貫)은 호족의 세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었고, 그러므로 문벌(門閥) 또는 가문(家門)이 중요시되었으며, 호적(戶籍)이 평민과 별도로 작성되었다. 호족은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혼인정책(婚姻政策)을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은 가문으로서의 최고 영예일 뿐만 아니라, 정권 장악의 첩경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추구하는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나타났다.

안산 김씨(案山金氏)와 인주 이씨(仁州李氏)는 대표적인 존재였다. 신라계였던 안산 김씨는 김은부(金殷傅)가 세 딸을 신라 왕실의 외손이기도 한 현종(顯宗)의 비(妃)로 들인 이후 문종(文宗)에 이르는 4대 50여 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차지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신라계였던 인주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현종의 아들이었던 문종(文宗)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인종 때까지 7대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그 외에도 최충을 대표적 인물로 하는 해주 최씨도 당대의 명문(名門)이었다.

이리하여 고려는 정치·사회 면에서 귀족 중심의 체제가 이루어졌다. 수도 개경은 귀족의 중심지로서 또는 전국의 심장부로서 발전하였다.

8. 통치 기구[편집]

고려는 신라를 잇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통일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신라의 지방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제도 위주의 신라 시대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신라 때보다 더욱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태조· 광종은 연호를 세워 대외적으로도 황제를 칭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의 군주들 또한 스스로를 짐(朕), 수도를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을 폐하(陛下), 차기 보위를 계승할 임금의 장남을 정윤(正胤) 또는 태자(太子), 군주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와 칙(勅)으로 부르는 등 제국의 제도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3세기 원나라의 지배 이후, 모든 제도가 격하되었다. 짐(朕)을 과인(寡人)으로, 폐하(陛下)를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도 세자(世子)로 불렸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12세기 후반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8.1. 중앙 관제[편집]

태조 왕건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신라 시대의 골품제(骨品制)를 청산하고 왕권(王權)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지고 왕권이 확립된 성종(成宗)에서 문종(文宗)에 이르는 기간에 당(唐)·송(宋)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 완성하였다. 임금의 최고 고문(顧問)으로 삼사(三師)와 삼공(三公)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가 최고의 영예직이요, 실무는 보지 않았다. 중앙 행정의 최고 기관으로는 삼성(三省)·육부가 있었으며, 삼성은 중서(中書), 문하(門下), 상서(尙書)의 세 성(省)이며, 이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문하성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사무, 중서성은 조칙(詔勅)에 관한 사무, 상서성은 실지로 국무(國務)를 맡아보는 집행 기관으로 그 밑에 6부가 있었다.

문하성의 장관을 시중(侍中)이라 하고 수상(首相) 격이었으며, 중서성의 장관은 중서령(中書令),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尙書令)이라 하였다. 이 성의 고관을 재신(宰臣)이라 불렀다. 이 중에서 문하성과 중서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합해서 중서문하성이라 불렀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육부는 이부(吏部)·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形部)·예부(禮部)·공부(工部)였다. ① 이부는 관리의 임면과 상작(賞爵), ② 병부는 무관의 임면, 군무의(軍務)·의장(儀仗), 우역(隅驛), ③ 호부는 호구, 부역, 전량(錢糧), ④ 형부는 법령, 소송, 형옥(形獄), ⑤ 예부는 예의, 제사, 조회(朝會), 교빙(交聘), 학교, 과거, ⑥ 공부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조(營造)를 각각 맡았다.

이 밖에 삼성과 거의 같은 자격을 가진 삼사(三司)가 있어 국가재정을 통일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h] 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삼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그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삼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또 이 두 기관을 양부(兩府)라 한다. 특수 기관으로, 국가의 주요한 격식(格式)을 결정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 감찰을 맡은 사헌대(司憲臺), 조명(詔命)을 맡은 한림원,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사관(史觀)[i], 대학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보문각(寶文閣)은 경연과 장서를 맡았고, 어서원(御書院)은 왕실 도서관이었고, 비서성(秘書省)[j] 은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맡았다. 재주 있는 문신(文臣)을 뽑아 임금을 모시게 한 홍문관(弘文館)[k], 또 조회(朝會)와 의식(儀式)을 맡은 합문(閤門), 제사와 증시(贈諡)를 맡은 태상시(太常寺), 감옥을 맡은 대리시(大理寺), 빈객에 대한 연회와 접대를 맡은 예빈시(禮賓寺), 시장을 단속하는 경시서(京市暑), 왕실과 종친의 족보를 맡은 전중성(殿中省), 왕실의 의약과 질병 치료 등을 맡은 태의감(太醫監), 공로(公路)와 역원(驛院)을 맡은 공역서(供驛暑) 등이 있었다.

8.2. 지방 행정[편집]

고려의 지방제도는 건국 초기에는 미처 중앙의 행정력이 전라도까지 미칠 수가 없어서 전라도 행정은 호족(豪族)들에게 방임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뒤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두어 여기에 중앙의 관원을 파견한 것이 지방관제의 시초였다. 그러다가 차츰 왕권의 확립을 보게 된 995년(성종 14)에는 경기 이외의 전국을 편의상 10도(道)로 나누는 동시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단련사(團練使)·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 등 외관을 설치하였지만 10도는 이내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단련사·자사·방어사 등의 외관직도 곧 폐지되었다.

결국 전국은 5도 양계와 경기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9. 경제[편집]

고려는 상업을 중요시하였다 고려는 신라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또한 신라의 민정문서 제도를 계승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안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는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이 와서 활발하게 무역하여 인삼, 농기구,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유리 공예품, 서적, 비단 등을 수입했다.

9.1. 대송 무역[편집]

고려는 정치적으로 송나라와 밀접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 민족을 견제했다. 또한 양국은 빈번한 교역을 통해 서로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귀족들의 애호품인 능견(綾絹 : 비단)·자기·약재·악기·향료·문방구(종이·붓·먹)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자기·서적은 각각 고려의 청자와 목판 인쇄술(木版印刷術)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밖에 다른 물품 수입은 귀족의 사치 풍조를 더욱 조장시켰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은·구리·인삼·송자(松子 : 잣)·모피 등의 원산품과 능라(綾羅 : 비단)·저마포·백지(닥나무 종이)·금은동기·부채·금은장도, 그 밖에 종이·붓·먹 등 가공품이 많았다.

9.2. 대원 무역[편집]

2005년 7월에 중국 산둥(山東)성에 발굴된 고려 선박에서는 고려 상감청자와 옹기, 접시 등의 토기가 나왔다. 원나라의 무역선이 아닌 고려의 배 또한 원양 항해에 나섰다.

10. 군사[편집]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