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긍정적 평가
1.1. 경제정책1.2. 문화 발전1.3. 화해와 용서
2. 부정적 평가
2.1.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2.2.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2.3. 임기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2.4. 임기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2.5. 구조조정과 경기증진 관련
3. 본 문서 정보

1. 긍정적 평가[편집]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노무현은 그가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229]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1년 8월 노태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찰력이 예리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총명함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 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APEC이나 ASEM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

1.1. 경제정책[편집]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정권 때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김대중의 집권 시기인 1998년 ~ 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 1천 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 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 214억 1천 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 10억 700만달러 증가했다. 이로 인해 세계 4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 100만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 6천 2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국제거시금융실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대중의 경제적 성과를 꼽으라면 단연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는 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정보기술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며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서 큰 버팀목이 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황 연구원은 "당시에 외환보유액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지난해 금융위기 때 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혹독한 감원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국민이 이를 감내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도록 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선임연구원은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로 꼽혔다.

이내영 고려대학교 교수는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라며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며 "그 전까지만 해도 복지문제는 유럽처럼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개념에 머물렀다"며 "복지증진을 경제발전, 경쟁력 향상과 동시에 추구, 과거와 차별화한 정책을 보여줬다"라고 평가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라고 평가했다. 성균관대학교 김성주 교수는 "전직 대통령을 포함,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DJ는 국가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국난 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는 IMF 관리체제 극복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한 김대중 정부와 노사 간 화해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DJ는 국민화합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은 특별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극찬했다. 이 대통령은 이 기고문에서 지난 97년 한국이 IMF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담을 자세히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경제고비마다 직접 뛴 DJ'라는 제목으로 10년 전 외환위기를 맞아 당선 사흘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차관을 만나 정리해고가 포함된 IMF협약 플러스 개혁추진을 약속하는 면접 시험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낸 점이 외환위기 극복의 전기가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국민과의 대화를 마련, 진솔하게 국민을 설득시켜 개혁동참과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는등 국민적 힘을 결집시키는 한편 코드 상관없이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등 능력위주 경제팀을 구성하고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부문 개혁을 전투처럼 밀어 붙여 취임 1년 반만인 1999년 8월 15일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였다며 김대중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말에 발행된 중앙 선데이에 '97년 외환위기때 이회창 도운 과거 안묻고 코드 버렸던 DJ'제목으로 된 장문의 기사를 통해 97년 외환위기 진행및 극복과정과 관련하여 김대중이 보여준 뛰어난 환란극복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

매일경제 신문이 2012년 5월 1일, 정부별로 집권기간 중 '경제업적지수' 평균을 분석한 결과 김대중 정부는 82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는 68.9, 이명박 정부는 44.1을 기록했다. 경제업적지수는 과거 뉴욕증권거래소가 주요 선진국의 경제적 성과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표로 알려져 있는데, 분모에 경제고통지수, 즉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을, 분자에 경제성장률을 대입한 다음 100을 곱해서 산출한다. 따라서 경제성장률이 높거나 실업과 인플레이션율이 낮을수록 높은 점수가 나오게 된다.

2004년 감사원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과 경기증진에 관련하여 감사를 실시했다. 당시 정부가 투입한 164조원의 공적자금이 IMF경제위기 극복은 물론 경제회복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감사원의 감사결과 드러 공적자금 투입은 적절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평가했다. 감사원이 밝힌 공적자금 관리실태 감사결과에 따르면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결과 부실채권 규모는 98년 3월 112조원에서 지난해 6월엔 39조원으로 줄어들었으며, 은행 BIS비율은 같은 기간 7%에서 10.5%로 높아지는 등 금융기관이 크게 건전해졌다.

아울러 98년 1월 11.7%에 달했던 은행금리는 지난해 6월 기준 6.24%로 낮아졌고, 회사채수익률도 외환위기 당시인 97년 12월 23.36%에서 지난해 6월엔 5.45%로 낮아져 금융시장이 크게 안정됐다. 또 실물경제 회복도 두드러져 설비투자증가율이 98년 마이너스 38.3%에서 2000년엔 35.3%로 높아졌고, 제조업도 같은 기간 마이너스 7.4%에서 15.9%로, GDP성장률은 마이너스 6.7%에서 9.3%로 높아졌다.

이와 관련 감사원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우리나라 국가신인도가 투자부적격에서 투자적격으로 높아지고, 외환보유액도 97년 외환위기 당시 39억 달러에서 지난해 6월엔 1천317억 달러로 늘어나게 됐다"며 "이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겨 2001년 8월 IMF를 조기 극복하는 동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공적자금지원을 통해 GDP 626조원, 재정수입 134조원의 증대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1998년 GDP는 △12.7%, 1999년에는 △22.0%, 2000년에는 △34.9%로 계속 급락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공적자금투입의 성과는 커, 정책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98년 1차 공적자금 64조 원의 투입으로, 2001년까지 금융위기에 따라 900조 원 가까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295조5천억 원에 그친 것으로 추정했다.

1.2. 문화 발전[편집]

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연예인 뿐만 아니라 해외 스타들도 만나 대중문화의 발전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서태지의 음악성을 비롯해 그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며 공개석상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당시 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그 예산을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문화산업의 각 분야는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특히 재임 당시 일본 영화 및 음악 등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해 한일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1.3. 화해와 용서[편집]

1999년 5월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대구·경북을 방문해 지역 원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242] 김대중은 당시 만찬에서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지 여부를 막론하고 그가 6·25 폐허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김대중이 무엇보다 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해 그야말로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설정했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의 발언에는 지역 화해 의지도 배어 있다. 대구ㆍ경북, 나아가 영남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를 끌어안음으로써 영ㆍ호남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43] 2009년 8월 14일 전두환은 입원 중인 김대중을 문병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우리 전직들이 제일 행복했어요. 5년 재임 기간 동안 청와대 10번 가까이 초대 받아가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라고 말해 그러면서 어떤 대통령은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고 덧붙이면서 회고했=== 다.
외국의 긍정적 평가 ===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으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기술하였다.

미국의 작가·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전화를 통해[모호한 표현] "아내 하이디와 저는 대통령께서 최근에 아프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쾌차하셔서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다시 만찬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수년 전 대통령과 가진 첫 만남 이래 대통령님을 계속 깊이 존경해 왔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의 모범국가로 변화시키신 분이다. 무슨 일이든 저희 부부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불러주시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MIT 언어학과 교수 노엄 촘스키는 "오래 기간 존경해왔다"며 "그는 남다른 용기를 갖고 일관되게 한 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과 세상 모두에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 대학교 명예교수는 "햇볕정책을 만들어낸 비전,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 세계와의 화해 추구 노력을 존경한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위인 가운데 한 분이다"라고 강조했다.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라고 극찬했다. 최근 미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는데 정치 시스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의 리더십을 상기하며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김대중을 "위대한 비전, 위대한 상상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다이안 파인스타인 미 상원의원은 "역사 속의 인물인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비전을 가진 분을 지도자로 가진 한국민은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김 대통령은 비전이 있고 그것을 조직적 방법으로 추진하는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업적 위에 우리가 대북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라고 평가했다.

제임스 울펀슨 전 세계 은행 총재는 김대중에 대해 "엄청난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뤄낸 김대통령은 만델라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민주화뿐 아니라 경제의 재구축에 성공하고 있는 김대통령은 세계를 감동시키는 지도자 입니다"라고 평가했다. 미셸 캉드쉬 전 IMF 총재는 고별기자 회견에서 "한국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 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게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레이건 신화'의 주역 마이크 디버 전 대통령 특보는 "김 대통령은 메이크 업이 필요 없는 논픽션 드라마의 인생을 살아왔다"며 "이름 석자만 갖고도 국제사회에 영향을줄 수 브랜드"라고 극찬했다. 미국 망명 시절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펴낸 《대중경제론》과 《3단계통일론》는 하버드 대학교의 교재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는 "김 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라고 극찬했다. 요하네스 라우 전 독일 대통령은 "김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라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대북정책에 대해 "김 대통령은 지금 한반도의 정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전주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의 일관된 비전과 강인한 의지는 이를 성공작으로 만들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방예산을 줄여 사회복지를 늘릴 수 있겠지요"라고 평가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에게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반도의 명운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밝혔다. 한종우 시러큐스 대학교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시고, 북한과의 교류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으셨다"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미국 UCLA대학 교수는 "김 대통령처럼 한국 경제에 공헌한 대통령은 없기 때문에 한국민은 떠나가는 김대중씨를 마음으로부터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단임 5년에 지금처럼 많은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5년 사이에 한국 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대통령"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어 한국과 일본 경제를 비교, "한국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망이 좋아졌다"면서 "장거리 트랙경기로 친다면 일본보다 2 바퀴정도 뒤쳐졌던 한국이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다가온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살아남아 더욱 강해진 재벌의 총수들은 결코 김대중씨에게 감사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245]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는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블룸버그는 "77세의 김대중씨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를 김대중을 꼽았다. 바이든 부통령은 햇볕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는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에리크 손하임 노르웨이 환경개발부 장관은 "저의 개인적 영웅이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많은 일을 하셨다"라고 평가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 교수도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친구를 넘어 인류애를 갖춘 인격자"라고 김대중을 평하곤 했다. 노르베르트 람머트 독일 국회의장은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한국인은 없다"라고 거듭 밝힌바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국민과 유가족들이 김 전 대통령의 삶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는 용감했고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했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는 한편 햇볕정책을 통해 대북관계에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에곤 바르 전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최악의 분단을 극복해 냉전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평화와 긴장완화,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남한과 북한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는 김 대통령의 끈기에 탄복했다"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라고 덧붙였다.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 연방하원의원은 김 대통령의 개혁 성과, 남북화해를 위한 기여를 기리고자 책자를 발간하게 됐다면서 퇴임 후 적절한 시기에 독일과 유럽을 방문해 강연 등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글을 쓴 필자들에는 요하네스 라우 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의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곧 퇴임해 권력을 잃게 될 한국 대통령의 생애와 철학, 정치 등에 관해 평가하는 글을 이토록 많은 유명 인사들이 원고료도 받지 않은 채 기고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독일 국방장관을 지낸 폴커 뤼헤 하원 외무위원장은 "유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 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김 대통령이 일관된 원칙을 세워놓고 꾸준히 추구해온 김 대통령의 인생에 관해 엮은 이 책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뮌헨 대학교 정치학과의 고트프리트 카를 킨더만 교수는 "지난 2000년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교류 및 공동사업을 위한 희망찬 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킨더만 교수는 "최근 한국 내에서 김 대통령이 이 획기적 계기 마련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투입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과거 서독 정부도 동서독 관계를 완화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김대중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울리히 베크 독일 뮌헨대 교수는 김대중에 대해 "분명한 분석, 설득력 있는 주장에 놀랐다. 많은 정치가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가진 분은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설득당했다"라고 평가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김대중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김대중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 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했다"고 평가했다.

2. 부정적 평가[편집]

2.1.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편집]

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에도 북한의 무력 도발로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자 햇볕정책이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1억 달러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 수칙을 지시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교전 지침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발발 이후 김대중의 행동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 군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 이회창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만 부상당한 해군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을 보냈을 뿐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회담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총리실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각 군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는 참석하지 않고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것이 관례"라고 해명했다.[263] 김대중이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월드컵 공동개최국 국가원수로서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안보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2.2.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편집]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 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268]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때 타결된 신한일어업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을 수용하게 만든 여건은 김영삼 정권이 조성했고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포함되어서 영유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영삼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하며 감정 일변도의 외교를 벌인바 있다.
일본이 이 발언에 대한 보복으로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새 어업협정을 주장하며 기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1997년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협상을 종용하던 일본은 '적선영해기선'을 임의로 설정해서 이를 침범한 한국 어선을 나포했고 결국 1997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 지리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주변수역을 제외하고 협정을 체결하려는 의사를 표하고 김영삼 정부도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해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또한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들어갔으므로 신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그는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라고 새 어업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바 있다.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협정과 독도밀약이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

2.3. 임기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편집]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연정상대였던 자유민주연합은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총재(1995.09~2001.11)였던 여당은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자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키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해외에서까지 화제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에 자유민주연합의 강창희 의원이 꿔주기에 반발하여 출당 당하게 되자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자민련에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김대중은 의원 꿔주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김종필 등과 연합한 것을 계기로 1960년대부터 그를 지지하던 최기일은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여 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 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관련 로비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억 9,000여 만원을 뇌물로 받고 2억 2,000여 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 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김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

2.4. 임기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편집]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IMF사태가 터졌던 1997년 12월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3.1%로 전년동월의 2.3%에 비해 무려 0.8%포인트나 높아져 있었고 4년6개월만의 최고치를 기록한 상태였고.
서울지역의 노숙자도 97년 12월 IMF사태 초기 5백여명으로 전년도 200명비 폭증한 상태였고, 전국노숙자숫자는 1200명 5월 추청노숙자는 5000명으로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IMF는 예상보다 가혹하게 구조 조정 요구를 해왔으며, 2%대의 저성장을 권고했고, 일부 부실 종금사와 은행을 파산시키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김대중당선자가 98년 초 신년사에서 민주적 시장경제 정착과, IMF의 협약이행, 사회경제적 안정등의 목표를 발표했다. IMF 요구에 의한 구조조정의 본격화로 실업률은 98년 5월에 7%로 폭등하였다.
1998년 6월 29일,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대동은행, 동화은행, 동남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에 퇴출명령을 내려 5개 은행들이 제거당한다.
공무원도 98년 당시 5만명 감축계획을 발표하여 실행에 들어갔다.

실업률은 99년 2월, 10%에 달해 사상 최악의 수준까지 폭등했지만  이후 99년 10월엔 4.6%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를 반갑고 다행한 현상으로 여겼지만 자만하지 말고 고용구조개선에 관심을 가질것을 당부했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외환유동성 위기 속에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와중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3년만인 2000년 12월4일 김대중 대통령이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2001년 8월23일에는 IMF 구제금융 자금 총 19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를 공식 '졸업'했다. 이는 사상 유례없는 조기 위기 극복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큰 업적으로 기록됐다.

2.5. 구조조정과 경기증진 관련[편집]

IMF가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하게 되면서 많은 기업들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그중 하나은행, 국민은행 등 대형 은행만이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해 부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 유수 은행들이 미국계 금융기관등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m 이러한 미국계 금융기관들은 다시 몇 배의 차익을 남기고 다른 외국계 은행에 되팔아 결과적으로 국내 금융시장에서 미국자본의 종속화를 만들었고, 일부 대형은행만 살아남고 지방 중소형 은행들(강원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에는 강제해체 명령을 내려 지방경제를 파탄시키고[294] 대형은행들만 살렸고 그 과정에서 외국 투기세력들의 배를 불려줘 "은행권 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논란의 정점에는 98년 제일은행의 뉴브리지캐피탈 매각 건이 있었다.[293] 1999년 뉴브리지캐피탈은 8조 4,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의 지분 48.56%를 5000억원에 구입하여 이를 5년 뒤인 2004년에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3조 4,000억에 되팔아 1조 5000억의 차익을 남기게 된다. 1999년 매각 당시 김대중 정부는 지분 70% 구입 의사를 보였던 HSBC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분 48.56%를 5000억원에 구입하겠다는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안에 맞추기 위해 대규모 유상 감자와 액면 병합을 거쳐 제일은행의 총 자본금을 4조 4806억원에서 9806억원으로 줄였으며 매각 후 3년 내 발생하는 모든 부실 여신에 손실이 있을 경우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 주는 풋백 옵션까지 추가하였다.

IMF 사태로 위축된 국내 경기 증진을 위한 정책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국내 경기 증진을 위해 의욕적으로 실시한 정책으로는 코스닥과 벤처산업육성 정책과 신용카드 발급 기준 완화로 대표되는 소비 증진 정책이 있는데, 먼저 벤처산업 육성 정책의 경우 신성장동력을 키운다는 명분하에 무차별적인 기업 지원 정책 남발 및 1995년 이래로 확산된 미국의 닷컴 버블과 맞물리며 벤처기업에 과도하게 투자금이 몰려 과열 양상을 띄게 된다. 벤처 기업과 연루된 정경유착 비리도 발생했다. 윤태식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가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성장동력을 찾는다는 당초 명분과 크게 동떨어진 양상을 보이던 벤처업계는 결국 2003년 새롬기술 사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IT기업들이 주류를 이뤘던 벤처기업들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하고 활로가 막혀 결과적으로 국내 IT산업을 파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코스닥의 경우 2000년 3월, 294포인트까지 폭등했던 코스닥 지수가 불과 9개월만에 무려 80%가까이 폭락하여 120조원을 허공에 날린 사태가 벌어졌다. 2000년 하반기 IT붕괴사태가 시작되자 주식시장과 코스닥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코스닥은 2001년에 50포인트선을 밑돌게 된다. 투자자들은 2000년 하반기의 IT붕괴사태와 "진승현 게이트"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소비 증진 정책의 핵심이 되었던 신용카드 발급기준 완화 정책은 1999년 2월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 50% 제한을 폐지하고 5월엔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인 70만원을 전격적으로 폐지하면서 실시되었다. 2001년엔 카드사의 영업자유권 침해를 들어 길거리 회원모집을 허용하는 등 신용카드 발급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내수 경기 진작을 도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대거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고 카드사의 재정상황도 악화되어 LG카드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등 카드 대란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결국 2003년에 다시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을 5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시민들의 가정들이 파탄난 뒤의 일이었다.

3.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