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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1. 나라의 등장과 발전
1.1. 고조선1.2. 삼국1.3. 신라 통일과 발해1.4. 불국사, 석굴암
2. 1.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 2.독창적 문화를 발전시킨 고려
2.1.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2.2. 거란의 고려 침입 과정2.3. 몽골의 고려 침입2.4. 고려청자2.5. 팔만대장경, 금속 활자
3. 1-3 민족 문화를 지켜 나간 조선
3.1. 조선의 건국3.2. 세종 대에 이루어 낸 발전3.3. 유교 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 모습3.4. 임진왜란3.5. 병자호란

1. 1.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1. 나라의 등장과 발전[편집]

1.1. 고조선[편집]

청동기 시대 이후 권력을 가진 사람 들 중 파워있는 사람들이 주변을 모아 고조선이 등장함.
고조선의 법을 보고 큰 죄는 엄격히 다스림, 사유 재산 인정, 화폐 개념의 존재, 신분 제도의 존재 등을 알 수 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부족 정복, 통합하며 세력 확장. 대표적으로 미송리식 토기, 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등의 문화유산이 있음.

1.2. 삼국[편집]

고조선 멸망 후...
국가
백제
건국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옴
지역
한강 주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음.
(4세기) 근초고왕은 남쪽 지역으로 영토 확장, 고구려 공격 후 북쪽 진출. 활발히 교류
국가
고구려
건국
주몽이 부여를 떠나서 건국함.
지역
졸본

고구려는 국내성(지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꾸준한 정복 활동으로 5세기에 전성기를 맞음.

-광개토대왕.
서쪽으로 요동 지역 차지, 남쪽으로 백제의 영역인 한강 지역을 차지하고 세력 확장.

-장수왕
광개토 대왕릉비-업적 기념
평양 지역으로 도읍 옮기고 남쪽으로 영역 확장.
국가
신라
건국
박혁거세
지역
현재 경주

5세기 고구려의 파워때문에 남쪽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가 함께 맞섰고 6세기 법흥왕은 남쪽으로 낙동강 넘어 가야 지역까지 세력 확장.
이후 진흥왕은 백제 연합군과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 차지. 한강 유역을 놓고 신라-백제 전쟁, 신라 승리. 또 대가야 흡수, 가야 연맹 소멸시킴.

--문화

고구려-많은 벽화.
  •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백제-불교 관련 문화유산 뿐 아니라 고분과 공예품도 많이 남김.
  • 무령왕릉
    • 중국 화폐 발견
    • 금제 관식, 발견된 중국 도자기
  • 백제 금도 대향로
  • 미륵사
이런거 보고 사람들의 당시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뭐 그런 문제나올거 예상해봄.

-신라, 가야 문화유산

삼국-가야 경쟁하기도 했지만 교류하기도 함. 중국, 일본, 서역 등과 교류하며 문물 교환하기도 함.
신라-봉수형 유리병, 금관총 금관, 도기 기마 인물형 명기, 경주 첨성대, 황룡사 9층 목탑

신라는 불교를 이용해 정치에 적극 이용하기도.

-가야: 철. 이를 이용해 활발히 교역, 우수한 칼, 창, 갑옷.

1.3. 신라 통일과 발해[편집]

신라의 김춘추는 당과 동맹을 맺고 왕위에 오른 후 백제 멸망시킴. 이후 문무왕은 당과 함께 고구려 멸망시킴. 김유신은 삼국 통일에 기여. 백제, 고구려 멸망 후 당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 함, 이후 신라는 당을 상대로 전쟁하여 승리했고 이로써 문무왕 때 삼국 통일.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스스로 고왕이라 칭하며 동모산 지역에 발해 건국.
"해동성국"(의미 생략)

스스로 고구려 계승함을 내세움.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활발히 교류,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문화 발전시킴.
발해 도읍지: 상경과 그 주변에서 불교 관련 문화유산 많이 발견->발해에서 불교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음.

1.4. 불국사, 석굴암[편집]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석굴암: 본존불, 일제의 보수(?)를 가장한 파괴

2. 1.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 2.독창적 문화를 발전시킨 고려[편집]

2.1.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편집]


신라 말 정치 혼란->새로운 정치 세력 호족 등장.
이 중 견훤과 궁예는 국가를 건국함. 견훤-후백제(900), 궁예-후고구려(901).
신라 말 나라가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훗날 고려)로 나뉨(후삼국)
왕건은 송악(개성)의 호족으로 궁예의 신하가 되어 후고구려 건국에 기여, 높은 지위에 오름.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은 고려 건국(918)
고려 건국자;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페배하여 위기를 겪었지만 몇 년 뒤 승리함. 후백제는 왕위 다툼으로 힘이 약해지고 신라가 항복(935), 고려는 후삼국 통일
왕건은 불교 장려, 백성 생활 안정, 세금 줄임. 정치 안정을 위해 호족을 적절히 견제하되 존중하며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유민을 받아드리고 북쪽으로 영토 확장.

2.2. 거란의 고려 침입 과정[편집]

거란은 당 멸망 후 북쪽 지역에서 세력 확장, 건국. 고려는 거란이 발해까지 멸망시키자 거란 경계. 송 건국 후 고려는 송과 우호적으로 지내며 더욱 경계.
  • 거란은 고려-송 관계를 끊으려 고려 침입(거란의 1차 침입)
  • 첫 전투 패패배, 서경(평양)에 간 왕과 신하는 대응 방안 논의. 이 때...
  • 서희는 거란과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
    • 서희는 거란의 침입 의도를 파악하고 적의 진영으로 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임(서희의 담판)
결과: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할 것.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차지.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예상, 강감찬에게 물자 준비, 군사 훈련. 이후 거란 침입, 고려는 승리할 수 있었음. 거란은 패배하면서도 계속 개경을 향해 나아감. 고려는 성 밖에 식량이나 물자를 남기지 않았었고 이에 거란은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가는 동안 강감찬을 비롯한 고려군은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침(귀주 대첩)

2.3. 몽골의 고려 침입[편집]

칭기즈 칸이 부족을 통일하여 건국된 몽골은 세력이 강해지면서 주변 나라들을 침입하며 물자를 과도하게 바칠 것을 요구했고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물자를 무리하게 바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사신이 죽자 몽골은 고려를 침입함.(몽골의 1차 침입)
이 이후 고려는 도읍을 개경->강화도로 옮기고 싸움.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몽골군가 싸웠고 귀주성, 처인성, 충주성 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토 황폐화, 많은 사람들의 희생. 황룡사 9층 목탑 등 문화재가 불탐.

몽골의 6차 침입에서 국토는 거의 황폐화됨.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삼별초는 이에 반발.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지만..
몽골의 침입을 받은 나라는 대부분 멸망되었지만 이에 비해 고려는 몽골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나라 유지, 문화를 지킬 수 있었음.

2.4. 고려청자[편집]

추가바람.

2.5. 팔만대장경, 금속 활자[편집]

추가바람.

3. 1-3 민족 문화를 지켜 나간 조선[편집]

3.1. 조선의 건국[편집]

  • 고려 말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음.
  • 신진 사대부의 일부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며 신흥 무인 세력과 손잡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함.
  • 고려는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지역을 공격하게 했지만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잠잡음.(위화도 회군)
  • 정몽주: 고려 유지, 개혁(고려 개혁파), 정도전: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 세우려함.(조선 개국파)
  • 갈등 심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 건국.
  • 도읍을 개경(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김.

3.2. 세종 대에 이루어 낸 발전[편집]

세종 대에 과학 기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
  • 집현전으로 연구 기관을 확대 개편->학자를 키우고 과학 기구 발명. 농사직설.
  • 신분 관계없이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여 과학 기술 개발, 연구하도록 함.(예시: 장영실)
  • 신하들에게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와 같은 과학 기구를 만들게함.
  • 달력. 칠정산
  • 앙부일구, 자격루
  • 훈민정음
  • 인쇄술-더 정교해지고 읽기 쉬워진 금속 활자
  • 국방-쓰시마섬(대마도)정벌, 북쪽으로는 4군6진 개척
  • 세종실록지리지를 펴냄

3.3. 유교 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 모습[편집]

  • 백성은 나라에 충성, 부모와 어른 공경, 남녀, 아이-어른 예절
  • 오늘날 혼인, 장례, 제사 문화도 영향받음.
  • 신분. 생략함.

그냥 여기 파트 생략.

3.4. 임진왜란[편집]

200여년간 평화,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지만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며 잘 훈련되어있었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정복하려 1592년 4월 13일 새벽 부산으로 쳐들어옴.(임진왜란)
부산진, 동래성 함락하며 한양으로 향하고 조선군은 패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 육지에서 조선군은 거듭 패배,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무찌르고 있었음.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은 판옥선, 거북선 만들고 식량, 무기 준비하여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
계속해서 승리하여 조선 수군은 남해를 찾고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 지대를 지킬 수 있었음.->일본군은 전략을 펼치는데 어려움을 겪었음.

(이순신-학익진 전법)

이 때 육지에서는 의병 활약. 신분은 다양했음.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으로 의병을 모아 싸움. 명의 군대가 참전.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
일본군은 공격을 했으나 관군, 의병, 승병이 힘을 합쳐 승리를 거둠.(행주 대첩)

일본은 강화 회담을 제안했지만 실패, 일본군 재침입(정유재란)
이순신은 강화 회담 중에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지만 조정의 잘못된 판단으로 옥에 갖쳤고 대신한 원균은 일본군에 크게 패해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함. 이순신은 풀려났고 수군과 판옥선 정비. 명량 해협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뛰어난 작전을 구사하여 큰 승리를 거둠.(명량 대첩)

3.5. 병자호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