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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
파일:버락 오바마 사진.jpg
본명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
Barack Hussein Obama II
출생
1961년 8월 4일 (63세)
하와이주 호놀룰루
국적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학사(B.A.)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 법무석사(J.D.)
정당
가족
아버지 : 버락 오바마 시나어
어머니 : 앤 더넘
배우자 : 미셸 오바마(1992년 결혼)
자녀 : 말리아, 사샤
종교
개신교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임기
2009년 1월 20일~2017년 1월 20일
부통령
전임
조지 W. 부시(제43대)
후임
1. 개요2. 상세3. 생애4. 정치 경력
4.1. 주 의원4.2. 2004년 미국 상원 선거 출마4.3. 미국 상원4.4. 2009년 대통령 당선4.5. 2013년 대통령 당선
5. 주요 정책
5.1. 이라크 철수 문제5.2. 복지 강화5.3. 대 한반도 정책5.4. 생활임금 제공5.5. 근로소득 세액공제 확대5.6. 오바마 케어5.7. 부자 증세
6. 여론 조사7. 여담8.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44대 대통령이다.

2. 상세[편집]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총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케냐 출신의 아버지와 유럽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로, 컬럼비아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였으며, 로스쿨 재학 시절 하버드 로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에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로스쿨 졸업 후 시카고로 돌아가 민권 변호사로 일하였으며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헌법학을 가르쳤다.

1997년에서 2004년 사이에 그는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에서 3선하였다. 2000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의석을 얻지 못한 그는 2004년에 상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2004년 3월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그가 승리하였으며, 2004년 7월 민주당 전당 대회의 그가 맡은 기조 연설이 황금 시간대에 TV로 방영되는 등 일리노이 출신 상원 의원 선거 유세를 하면서 여러 사건을 통해 그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유세전을 벌인 끝에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을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9년 1월 20일에 제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11월 6일 열린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민주당의 재선 후보로 지명되어 밋 롬니 후보를 332 대 206으로 누르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3. 생애[편집]

오바마는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카피올라니 병원에서 캔자스주 위치토 출신의 영국계 미국인 앤 던햄과 케냐 식민지 니안자 주 니양오마 코겔로 출신의 루오족 버락 오바마 시니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의 부모는 1960년, 아버지 오바마가 해외 장학생으로 있던 마노아의 하와이 대학교의 러시아어 수업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1961년 2월 2일에 결혼하였으며,[7] 같은 해 버락 오바마가 태어났다. 그가 2살이던 해 오바마 부부는 별거하였으며, 1964년에는 이혼에 이르렀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재혼하여 케냐로 돌아가 두 아들 데이비드와 마크 은데산조를 낳았다. 그는 1982년 교통사고로 죽기 전에 아들 오바마를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한편 어머니 던햄은 하와이 대학에 다니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에토로와 1965년에 결혼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의 군사 독재자 수하르토가 1967년에 정권을 잡자, 해외에 있던 모든 인도네시아 유학생들은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던햄과 수에토로 가족도 인도네시아로 이사갔다.[10] 버락 오바마는 6살부터 10살 때까지 베수키 공립 학교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학교 등 자카르타의 지역 학교를 다녔다. 1971년 오바마는 외조부모인 매들린과 스탠리 아머 던햄과 같이 살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으며, 사립 대학 예비 학교인 푸나후 학교에 5학년으로 전학하여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1972년에 하와이로 돌아와 지내다가 1977년에 인도네시아에 인류학 현지 조사 일로 돌아갔다. 그는 마침내 1994년에 하와이로 돌아오지만, 1년 만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오바마는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버지는 내 주변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점 - 아버지는 피치처럼 시꺼멓고, 어머니는 우유처럼 하얗다 - 을 나는 개의치 않았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는 그의 투쟁을 자신의 다민족 혈통과 사회적 인식을 화해시키기 위한 어린 성년이라고 말하였다. 오바마는 호놀룰루에서 지낸 자신의 성장기를 반추하며, "하와이에서 얻는 기회(상호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것)는 내 세계관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내가 가장 아끼는 가치의 근간이 되었다"라고 썼다. 오바마는 또 십대 시절 알코올, 마리화나, 코카인을 복용한 사실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머리 속에서 잊으려"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대통령 후보 공개 토론에서 오바마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마약에 손 댄 일이 자신의 "최대의 도덕적 과오"라고 말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오바마는 1979년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탈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옥시덴탈에서 오바마는 여전히 흑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였으며, Earl Chew 등과 함께 흑인 학생회 활동을 하였다. 2년 뒤인 1981년에는 뉴욕 시의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하여 국제 관계학을 주전공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학사 학위를 땄다. 이 시기에 그는 잠시 뉴욕시 339 East 94번가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파키스탄 출신의 남성 불법체류자인 Sohale Siddiqi와 같이 살았다. 잠시 그와 함께 여자들과 어울리고 마리화나를 피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곧 학업에 열중하였고 그와 헤어졌다. 그는 1년 동안 기업 국제 회사와 그 다음으로 뉴욕 공공 이익 조사단에서 일하였다.

오바마는 이복 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삶 등에 영향을 받아 23세 때 시민단체 운동가로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미 일하고 있던 직장에서 중간관리자로 승진하여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상황에서 이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시민여러 인권단체에 입사 지원서를 내었으나 거절당하였고, 최종적으로 제리 켈먼과 면접 후 시카고로 가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감독으로 일하였다. 시민운동가로서 그의 첫 월급은 한화 150만원 정도인 12,000달러였다. 이 기관은 원래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의 그레이터 로즈랜드(로즈랜드, 웨스트 풀먼, 리버데일)에 있는 8개 천주교 교구로 구성된 교회 기반의 공동체 조직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1985년 6월부터 1988년 5월까지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하였다. DCP 감독으로 3년 동안 일하면서, 그의 직원 수는 1명에서 13명으로 연간 예산은 70,000 달러에서 400,000 달러로 늘었다. 그는 알트겔드 가든스의 주민 권리 조직, 직업 훈련 프로그램, 대학 예비 지도 프로그램 설립을 지원하였다. 오바마는 또 지역 사회 조직 기관인 개메일리얼 재단에서 고문이자 지도자로 일하였다. 1988년 중반에 그는 3주 동안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으며, 5주간 케냐를 여행하여 그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여러 부계 친척들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 2006년 8월에 오바마는 다시 아버지의 고향인 케냐 서부 키수무의 시골 마을을 다시 찾게 된다.

1988년 말에 오바마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1학년 후 여름에 하버드 법학대학원 대표 간행물 하버드 로리뷰의 편집인으로 선발되었으며, 2학년 재학 중에는 편집장이 되었다. 오바마는 1학년 후 여름에는 시카고 로펌 시들리 오스틴의, 그리고 2학년 후 여름에는 시카고 로펌 홉킨스 & 서터의 여름 인턴변호사로 일하였다. 시들리 오스틴에서 여름 인턴변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미셸 로빈슨을 대학원 선배이자 멘토 변호사로 만났다. 1991년 하버드 로스쿨에서 마그나 쿰 라우데급의 우수한 성적으로 법무석사(J.D.) 학위를 취득한 뒤, 시카고로 돌아갔다. 오바마가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하버드 로리뷰의 편집장에 당선된 일은 전국적인 언론의 조명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인종 관계에 대해 출판 계약을 맺게 되었으나 개인 회고록에 그쳤다. 이 육필 원고는 1995년 중반에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으로 출판되었다. 1992년 10월 미셸 로빈슨과 결혼했다.

4. 정치 경력[편집]

4.1. 주 의원[편집]

1996년 오바마는 앨리스 팔머 의원의 뒤를 이어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에 선출되었는데, 그의 선거구는 당시 하이드 파크-켄우드에서 남쪽으로는 사우스 쇼어, 북쪽으로는 시카고 론에 이르는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 주변 지역인 일리노이 제13구였다. 상원 의원이 된 오바마는 윤리 및 의료 입법에서 민주-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저소득 노동자의 세액 공제를 올리는 법안을 발의하였으며, 복지 개혁을 놓고 협상했고, 아동 의료 보조금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2001년, 양당 합동 행정 조례 위원회 공동 의장인 오바마는 공화당 출신의 라이언 주지사의 초고금리 소액대출 일부 제한과, 주택 압류 방지를 위한 약탈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 제한을 지지하였다.

오바마는 1998년에 총선에서 공화당 후보 예세 예후다를 물리치고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에 재선출되었으며, 2002년에도 다시 선출되었다. 2000년에, 그는 미국 하원 후보 경선에 도전하였으나, 당시 4선 현직 의원이었던 바비 러시의 득표에 절반 수준만을 얻은 채 패배하였다.

2003년 1월, 십여 년간 소수당이었던 민주당이 다시 다수당의 지위를 회복하면서,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의 의료 및 인간 서비스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경찰이 구금한 운전자의 인종을 기록하도록 규정하여 인종차별적 검문 관행을 감시하는 법안과 더불어 (미국에서 최초로) 살인 사건 심문을 반드시 비디오로 기록하도록 규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만장일치의 초당적인 지지로 통과시켰다. 2004년에 오바마가 미국 상원 총선에 출마해 유세할 당시, 경찰 대표자들은 오바마가 사형제 개혁 법령화를 위한 경찰 단체에서 그가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2004년 11월에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 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다가오는 미국 상원 선거에 도전하게 된다.

4.2. 2004년 미국 상원 선거 출마[편집]

2002년 5월, 오바마는 2004년 미국 상원 선거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가늠하고자 여론 조사를 의뢰하였으며, 2002년 8월에 선거 운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정치 매체 고문인 데이비드 액설로드를 끌어들였고, 2003년 1월에 선거 출마를 공식 발표하였다. 공화당 현직 피터 피츠제럴드 의원과, 민주당의 캐럴 모즐리 브라운 전 의원이 후보 경선 불참을 결정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 경선은 후보 15명이 난립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선거에 출마한 오바마는 액설로드의 지원으로 해럴드 워싱턴 전 시카고 시장의 이미지와 일리노이 출신의 폴 사이먼 전 상원 의원의 딸에게서 받은 지지를 내세워 선전하였다. 2004년 3월 후보 경선에서, 오바마는 일곱 후보 가운데 52%를 득표하여 차점자인 일리노이주 감사관 덴 하인즈보다 29%가 많은 표를 얻어 예상치 못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 일로 그날 밤 그는 민주당의 전국적인 신예 정치인으로 부상했으며, 장래 대선 도전도 고려해보게 된다.

2004년 7월 27일, 오바마는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서 열린 2004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했다.[54] 이 연설은 ABC, CBS, NBC 등 주요 상업 TV 방송사에서 중계되지는 않았으나, 총 910만 시청자들이 오바마의 연설을 보면서 전당 대회의 주요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당내 위상도 높아졌다.[55]

오바마가 총선 상대로 예상했던 경쟁자이며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잭 라이언은 2004년 6월, 미국 상원 의원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두 달 뒤, 앨런 키스가 라이언 후보를 대신하여 일리노이의 미국 상원 의원 공화당 후보 지명을 받아들였다. 메릴랜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키스는 총선 후보로 지명되면서 일리노이 거주자로 등록하였다.// 2004년 11월 총선에서 오바마는 27% 득표한 키스를 제치고 70%의 표를 얻어 상원 의원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일리노이 선거사상 가장 큰 득표차였다.

4.3. 미국 상원[편집]

2005년 1월 4일, 오바마는 상원 의원에 취임 선서를 하였다.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상원 의원이 되었으며 세 번째로 직접 선거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또 원내 흑인회의 유일한 상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비당파적 매체인 CQ 위클리 지는 2005년~2007년의 모든 상원 득표를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오바마를 '성실한 민주당원'이라고 썼다. 내셔널 저널 지는 2007년의 선별된 득표를 평가한 자료를 근거로 그를 '가장 자유주의적인' 상원의원으로 등재하였으며, 2005년에 16위로, 2006년에는 10위에 등재된 바 있었다. 2008년에 Congress.org에서는 오바마를 가장 강력한 상원의원 11위로, 그리고 일리노이주에서 72%의 지지를 받아 상원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등재하였다. 2008년 11월 13일, 오바마는 레임덕 회기가 시작되기 전인 16일에 의원직에서 사임하여 대통령 선거 준비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회 레임덕 회기에 대통령 후보자와 상원의원직의 지위가 충돌하는 일(워렌 하딩 이래 그런 예가 없었다)을 피할 수 있었다.

4.4. 2009년 대통령 당선[편집]

오바마는 민주당 경선과정에서부터 주로 젊은층과 여성 및 사회적 소수계층에서 더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2008년 1월 3일에 치러진 아이오와주의 민주당 당원대회에서 38%를 득표하여 30%를 득표한 존 에드워즈와 29%를 득표한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승리하였다. 이후, 현지시간 2008년 11월 4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8년 8월 27일에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지명된 미국연방상원의원 조셉 바이든이 오바마의 부통령이며, 관례에 따라 먼저 취임선서를 하였다.

가족관계는 미셸 오바마 여사와 두 딸들(말리아, 나타샤)이 함께 살고 있다.

현지시간 2009년 1월 20일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여 임기를 시작하였다.

4.5. 2013년 대통령 당선[편집]

오바마는 밋 롬니를 상대로 재선 경합을 벌였으며 이 재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게 되었다. 애초 워낙 박빙의 승부였으므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였으나 오바마가 오하이오주, 캘리포니아주 등 미합중국 대통령선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주의 선거인단 확보에 성공하여 예상 외의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하게 되었다.

2013년 1월 21일, 제45대 대통령 취임식을 시작으로 집권 2기를 시작하였고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에게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제 44대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5. 주요 정책[편집]

5.1. 이라크 철수 문제[편집]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의원시절부터 부시 행정부가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는 등 정당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라크 전쟁에 거듭 반대해온 그는, 집권시 2008년 3월까지 이라크에 파병된 자국 군인들의 완전한 철수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후 16개월 후 군인들을 철수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말했으며, 그 후에는 24개월로 말을 바꿨다.

5.2. 복지 강화[편집]

전 국민 건강보험 혜택(당선시 그의 첫 임기 말까지)과 우수한 인재 확보에 필요한 대학 교육 비용 절감 및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세금제도 개편 등 더욱 적극적인 사회복지정책들을 추진하고, 또한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교토 의정서의 조속한 비준과 더불어 에탄올 등의 대체에너지 개발을 촉진하며, 초고속통신망의 조기 구축을 통한 지식정보화 강국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아울러, 지나치게 보수적이면서 땅에 떨어진 워싱턴 D.C. 기성 정치권의 신뢰 회복 및 공정하고 투명한 정치제도 개혁을 약속했다. 또한 그는 동성결혼과 낙태를 지지하며, 줄기세포연구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찬성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5.3. 대 한반도 정책[편집]

2008년 2월 11일, 오바마는 자신이 속한 미국 연방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대한민국 행정부의 유은진 번역사를 거쳐 전해진 '남-북한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발표문에서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전 부시 정권의 불안한 접근 방식 등으로 인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보유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북한에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이 집권하면, 단호하고 지속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계속 추진할 것을 공언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 문제에서는 체결시 미국의 근로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협정이 될 것이라며 비준 반대 및 재협상 입장을 밝혔다. 특히 상호호혜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이 미국에 자동차를 파는 만큼 미국도 한국(시장)에 (자국의) 자동차를 팔 수 있어야 한다"며 자동차시장 분야에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5.4. 생활임금 제공[편집]

오바마는 노동자들이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은 최저임금 7.25달러를 10달러까지 올린다고 했다. 7.25달러에서 10달러까지 올린다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되고 비싼 병원비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해서다.

5.5. 근로소득 세액공제 확대[편집]

최저임금을 받는 전업노동자들은 현재 175달러에서 555달러로 3배가 넘는 근로소득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 유급 병가 일수 확대 ===
거의 대부분의 미국 노동자들 절반은 유급 병가를 얻지 못한다. 임금이 낮은 곳은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수준이 유급 병가를 받지 못 하기 때문에, 오바마는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유급 병가 7일을 주는 것을 의무화할 계획이다.

5.6. 오바마 케어[편집]

지금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보험에 의지하고 있을 것이고, 만약 보험이 없다면 비싼 진료비 걱정에 병원 가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오바마는 의료 보험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5.7. 부자 증세[편집]

오바마는 올해 미국 의회 발언에서 세금에 대한 서민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재벌들의 세금을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며, 미국 공화당의 반대로 아직은 법으로 만든건 아니지만, 오바마는 임기 내에 반드시 재벌들에 대한 세금을 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6. 여론 조사[편집]

오바마가 대통령 당시, 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선정됐다. USA투데이와 갤럽이 2008년 12월 12~14일 미국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오바마 당선인이 전체 응답자 가운데 32%의 지지를 얻어 남자 부문 1위에 올랐다.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1위에 오른 경우는 1948년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 11월에는 67%, 12월에는 76%로 점점 높아지더니 대통령 취임일 직전인 1월 20일에는 워싱턴 포스트(WP)와 ABC방송의 여론조사에서 80%의 지지율을 받았다. 1930년대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미국 내에서 오바마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수준으로 전 신분 전 연령층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단지, 만 70세 이상 백인 남성들에게서만 오바마에 대한 지지가 과반수가 되질 못했다. 오바마에 대한 지지도에서는 여성몰표, 흑인몰표는 물론 만40세 이하의 연령층에서 역시 몰표가 나왔다.

7. 여담[편집]

  • 구기종목을 굉장히 좋아하며 특히 농구와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농구의 경우 매일 할 정도로 애착이 강하며 축구도 이 못지 않게 좋아한다. 리오넬 메시의 팬이며 2022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하자 매우 기뻐하며 메시에게 직접 우승을 축하한다는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존경하고 링컨 대통령이 남부 출신 연극 배우 부스에게 암살당한 장소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당시 19세기 시대 흑인들은 남부에 많이 치우쳐 있으면서 백인들에게 많은 차별 대우와 폭행, 욕, 일을 하는 등 여러 가지 고생을 했었는데 링컨은 자신이 백인이면서도, 변호사를 거쳐 대통령까지 되면서 흑인의 자유와 평등사상을 주장했으며, 투표권을 주장했다. 그러자 흑인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가 싸우는 남북전쟁이 일어났는데 남부가 우세하여 북부가 어려워지기만 했었다. 그래서 링컨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였으며 동시에 1월 1일부터 흑인을 해방시키겠다는 발표를 하였고, 흑인이 최초로 군대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흑인 해방은 1865년에 북부가 완전히 남부를 이긴 다음에 이루어졌다. 이런 링컨 대통령의 평등주장이 결국엔 훗날 150년이나 지난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이루었던 것이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