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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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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초기
2.1. 유년기
3. 소년기4. 관료 생활
4.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4.2. 개화 사상 접촉박영효4.3. 관료 생활4.4.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서재필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생애 초기[편집]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와 이기대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 광언(또는 광효), 광업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 서재우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아버지 서광효는 그에게 쌍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가 뒤에 재필로 이름을 바꾸고, 자(字)를 윤경이라 지어주었다. 서재필은 후에 쌍경을 자신의 첫 아호로 사용하였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거짓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양자 출양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2.1. 유년기[편집]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

3. 소년기[편집]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양아버지의 권고로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 사기,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그 중에는 뜻을 아는 것도 있었으나 일부는 암기를 해 두었다. "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4. 관료 생활[편집]

4.1.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편집]

1878년(고종 15년) 봄 서재필은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고종 16년) 초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해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와 조혼,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33]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4.2. 개화 사상 접촉박영효[편집]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4.3. 관료 생활[편집]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초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의 건의로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

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학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4.4.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편집]

1884년(고종 21년) 1월에 게이오 의숙 1년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또한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 전반에 대해 배웠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6월 수료하였다. 그해 6월 일본에 체류 중 다시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서재필과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병조 예하에 조련국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조련국을 창설하였으나 서재필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6월 30일 고종의 특명으로 기복의 명을 받고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설된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폐지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