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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3. 대군4. 정치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조선의 제7대 국왕 세조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출생[편집]

1417년(태종 17년) 그레고리력 11월 11일, 태종의 셋째 왕자인 아버지 충녕대군(세종)과 경숙옹주 심씨(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궁궐 밖에서 양육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조는 한동안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그것은 당시 유아 사망의 정도와 궁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와 더불어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승하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아직 환경이 좋지 않은 탓도 있는 듯하다.

세조실록은 그에 대해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세조는 또한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아버지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3. 대군[편집]

1428년(세종 10년) 6월 16일, 진평대군에 봉작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당시 군기감 부정으로 재직중이던 윤번의 딸 낙랑부대부인 윤씨(정희왕후)와 결혼식을 올렸다.

1429년(세종 11년) 2월 세종이 평강에 친히 나가 무예를 강무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1431년 여름 피부병인 창진에 걸렸으나, 그해 9월 23일 의원 양홍달, 조청, 노중례 등의 진료로 병이 나았다. 세종대왕은 이들 의원에게 옷을 선물로 하사했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후에 봉작이 바뀌어 1433년(세종 15년) 6월 27일 함평대군이 되었는데, 함평은 함흥의 별칭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호를 전라도 함평현과 혼동될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그해 7월 1일 진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1445년(세종 27년) 다시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

1433년 12월 12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 맹날가래·최진 등을 세종대왕을 대신하여 전송하였다. 1434년 18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 등이 보고 감격하여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그는 일찍부터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5년(세종 17) 4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왔으나, 병으로 접견이 어려운 세종대왕 대신, 4월 27일까지 그가 명나라 사신단을 접대했다. 1436년(세종 18) 2월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4. 정치[편집]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 역대병요·의주상정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고 하였다.

1441년 6월 세종의 명으로 《치평요람》의 간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1443년 10월 말에는 토지의 측정에 참여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11월 전제 상정소가 설치되자 도제조가 되었다가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체력,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눈병,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