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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왕실의 문장.png
조선 국왕
朝鮮國王
파일:조선 왕실의 문장.png
조선왕실 의 문장
호칭
전하
관저
초대
마지막
순종
전신
고려 국왕
후신
대한제국 황제
1. 개요2. 상세3. 이름과 존호
3.1. 휘와 피휘3.2. 묘호와 시호
4. 지위 변동5. 권력6. 혼인7. 의식주8. 사망9.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조선 국왕은 조선의 국왕이다.

2. 상세[편집]

재위할 때에는 주상(主上), 상(上), 성상(聖上), 당저(當佇) 등으로 불리다가 생전에 왕위를 물려 주었을 경우에는 상왕(上王)으로 불렸다. 조선 시기 생전에 양위하여 상왕이 된 국왕으로는 태조, 정종, 태종, 단종, 고종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종은 대한제국의 상황제였다. 조선 국왕에게는 세 가지 공식 이름이 주어졌다. 태어나며 작성된 이름은 휘라고 하였고 사후에 묘호와 시호가 헌정되었다. 조선 국왕은 대개 묘호로 불린다.

조선의 국왕은 일반적으로 태조에서 순종까지를 이르지만, 순종의 경우 선대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가 된 이후 승계하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다.

3. 이름과 존호[편집]

조선 국왕의 이름은 휘라 하고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임금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피휘하였다. 사후에는 묘호와 시호 등의 존호를 따로 지어 추숭하였고 묘호는 사후 해당 국왕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3.1. 휘와 피휘[편집]

조선의 국왕들도 태어나면서 지어 받은 이름이 있었고 이를 휘(諱)라고 한다. 예를 들어 영조의 휘는 금(昑)이다. 한자 문화권의 군주제에서는 임금의 이름에 사용된 글자의 사용을 기피하였는데 이를 피휘라 한다. 조선의 국왕은 태어나서 받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아주 어릴 때 잠깐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별도의 아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휘보다는 작위로 불리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군이나 대군의 작위가 주어지면 주어진 작위와 함께 저하 등으로 불리다가 즉위 하면 주상 전하 등으로 불렸다. 피휘는 현재 재위 중인 국왕 뿐만 아니라 선대 국왕의 휘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짓는 왕실의 입장에서도 사람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되도록 쓰이지 않는 한자를 골라 외자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이름을 붙이는 것에 신중하였기 때문에 어릴 때에는 따로 아명으로 부르거나 국왕의 적장자의 경우엔 이름 없이 "원자 아기씨" 정도의 호칭을 사용하였고 봉작하여 관례를 하거나 세자로 책정되면 그제서야 정식으로 이름을 지어 휘로 삼았다.

3.2. 묘호와 시호[편집]

사후에 붙여지는 묘호는 태조나 세종과 같이 두글자로 이루어진다. 앞의 글자는 국왕의 구분을 위하여 여러 글자를 쓰지만 뒤의 글자는 조(祖) 아니면 종(宗) 두 글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조선 국왕이 사망하면 신하들이 모여 공(功)과 덕(德)을 살펴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으면 "조"를 덕이 많다 할 수 있으면 "종"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묘호는 후임자와 신하들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정해지곤 하였는데 예를 들어 세조의 경우 신하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을 묘호의 후보로 올렸으나 예종이 끝내 "조"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여 세조가 되었다. 묘호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신주를 올릴 때 사용되어 후대에서 해당하는 국왕을 부르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사용된다. 묘호는 한번 정하였더라도 사후에 다시 추존하여 변경하기도 한다. "조"의 권위가 "종"보다 높기 때문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선언한 뒤 영종, 정종, 순종을 각각 영조, 정조, 순조로 추존하였다. 현재 한국의 역사에서 불리는 이름은 고종이 추존한 뒤의 것이다.

한편 시호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이름으로[9] 예를 들어 태조의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다. 뜻을 풀이하면 "하늘이 내린 천운을 받들어 성인의 문화와 신과 같은 무위를 갖춘 대왕"으로 태조 이성계가 새로 나라를 세웠음을 강조한 시호가 된다. 이 가운데 "강헌"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이고 뒤의 것은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헌정한 시호이다. 조선은 중국과 사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시기에는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함께 사용하였으나, 청나라가 세워진 후 소중화사상이 생겨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중국이 내린 시호를 받았지만 내부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호만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의 선포 후 고종은 황제로서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 역시 신주에서 삭제하였다.

4. 지위 변동[편집]

조선의 국왕은 즉위함으로써 군주로 재위하였고 사망하거나, 양위 또는 폐위되면 차기 국왕이 군주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5. 권력[편집]

조선은 이론적으로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지만 실제에서는 신료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 조선은 건국부터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야만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

유교적 이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국왕 역시 《대학》이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당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경연과 같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유교적 이상의 모범이 되어야 하였다. 이와 같이 국왕은 “대저 군주는 백성에 의존한다.”라는 《조선경국전》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성군"이 되기를 요구받았다. 실제로 국왕이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조정은 사림파가 장악하였고 붕당 정치가 발달하게 되었다. 중종시기 이미 조선은 군주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군약신강이 언급된다. 그러나 왕실 역시 끊임 없이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국왕과 신료들 사이의 긴장과 타협이 조선의 정치를 이어가는 원동력이었다.

6. 혼인[편집]

조선의 왕비는 고려와 달리 공식적으로 1 명만이 인정되었다. 국가를 가문의 확장으로 인식한 조선 시대에 왕비는 "국모"(國母)로 여겨졌으며 국왕과 같이 모든 생활이 공적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 각종 의례를 관장하였고 국왕이 사망하여 새 국왕이 즉위할 때까지 임시로 국가의 의례를 책임지거나 새로 즉위한 국왕이 어리면 수렴청정을 통하여 정치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세자는 대개는 8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며 배필도 함께 맞았다. 왕비나 왕세자비는 간택을 통하여 결정되었는데 이론적으로는 조선 전체의 사대부가 왕실과 혼례를 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간택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에는 금혼령이 내려져 사대부 가문의 미혼 여성은 혼례를 치를 수 없었다. 간택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후보를 차츰 줄여나가 최종적으로 한 명을 골랐다. 조선의 전조인 고려는 외척의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어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기 전까지 특정 가문에서 왕비를 계속 배출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폐단이 있었고 조선 초 국혼에 대한 별다른 규정이 없던 시기 태종은 춘천 부사 이속이 혼담을 거절하자 이를 빌미로 간택 제도를 만들어 외척에게 왕실이 휘둘리는 일을 방지하고자 하였다.[54] 간택은 국왕이 주도권을 쥐게 되므로 정치적 판단에 따라 왕비나 왕세자를 선정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은 보통 혈통과 가문은 명망이 높아 위신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세력은 작아 국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가문을 선택하였다.

국왕은 왕비 외에 첩인 후궁을 둘 수 있어 빈(嬪),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등의 내명부 작위를 주었다. 중기까지는 숙의 등의 작위를 내린 뒤 차츰 승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정조 대에 들면 원빈홍씨의 경우와 같이 곧바로 빈의 작위를 주게 되었다. 많이 알려진 후궁으로는 연산군의 후궁인 숙용 장씨,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등이 있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인 적장자를 원자라고 칭하였고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여러 후궁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하였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한미한 집안의 고아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하였다가 후궁이 되었기 때문에 영조는 즉위 기간 내내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에 시달려야 하였다.

7. 의식주[편집]

곤룡포는 조선 국왕의 일상복이다. 단령의 일종인 곤룡포와 함께 익선관을 쓰고 허리에 옥대를 매었으며, 목화(木靴)를 신었다.

임금의 식단은 수라상으로 불렸으며 각종 반찬 12가지가 올라가는 12첩 반상이 규정이었으나[58] 유교적 이상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국왕은 음식도 검약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였기에 대개는 반찬의 가지 수를 줄여 내었다. 정조의 경우엔 이러한 검약이 강조되어 밥상에 일곱 그릇 이상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먹은 식단으로는 홍반. 냉이탕, 저포초 등이 올랐고 구이로 금린어, 은어, 세갈비구이 등이 자반으로 담염민어, 반건대구. 육장, 황육다식, 생치편포, 붕어찜 등이 올랐다. 음식은 조선의 국왕이 자신의 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몇 안되는 항목 가운데 하나였다. 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는 비린내가 나는 물고기류를 꺼렸다.

국왕은 궁궐에 머물러 생활하며 정사를 살폈다. 공식적인 의례는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같은 정전에서 이루어졌고 이들 정전은 각 궁의 중앙에 위치하였다. 그 옆으로 국왕이 평소 거처하는 대전이 있었으며 경복궁의 대전은 강녕전이고 창덕궁의 대전은 대조전이다. 삼강오륜의 부부유별 항목은 국왕에게도 적용되어 왕비는 중궁전(中宮殿)에 따로 살았고 이때문에 중궁이나 중전은 왕비의 별칭이 되었다. 경복궁의 중궁전은 교태전이다.

8. 사망[편집]

국왕의 사망은 "붕어"(崩御)라 하였다. 국왕이 사망하면 국상(國喪)으로 장례를 치렀다. 묘호와 시호가 정해지고 장지가 정해지면 국왕의 무덤인 능이 조성되었다. 국왕의 장례는 극진한 예를 다하여 5 개월간 36 가지 절차로 진행되었다. 여러 예법에 따른 절차가 많기도 하였지만 왕릉의 조성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왕릉이 조성되면 발인하여 운구하였다. 조선 역대 국왕의 실록은 대개 장례를 위해 준비한 행장으로 마감된다. 행장은 죽은 이의 이름과 존호를 밝히고 간략한 전기를 싣는 것이 보통이다.

폐위가 된 경우가 아니라면 사망한 국왕의 묘호를 적은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배치한다. 종묘 역시 사대부의 가문에 설치된 사당의 확장으로 이해되었는데 사당에 모시는 신주는 당대 가주의 4대조까지의 신주와 공덕이 높아 신주를 영구히 모시는 불천위가 함께 놓인다. 종묘 역시 이와 같은 예법에 따라 불천위로 모신 신주와 새로 즉위한 국왕의 4대조 신주를 모시게 되고 다른 신주들은 영녕전에 따로 모아둔다.[64] 종묘의 불천위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늘어 처음 시행된 연산군 시기에는 태종의 신위만이 불천위였으나 고종 대에 이르면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가 불천위가 되었다. 현재 종묘에는 19 실(室)에 19 위의 왕과 30 위의 왕후의 신주가 있다.

국왕이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를 종묘 제례라 하였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1월, 4월, 7월, 10월에 정기적인 제사인 정시제를 지냈고 국가에 좋든 나쁘든 큰일이 있을 때에는 임시제를 지냈다. 종묘 제례는 유교의 제례 규정을 국왕의 규모로 확장한 것이다. 유교 제례의 핵심적 절차는 조상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상징 의식인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의 삼헌례와 이후 자손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음복을 비는 음복례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국왕의 거둥과 제사상을 차리고 신위를 모시는 일 등이 더해져 종묘 제례를 구성하게 되며 제례가 이루어 지는 동안 종묘 제례악이 연주된다.

9.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