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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대 국왕
태조 | 太祖
파일:태조 어진.jpg
태조 어진
신상정보
출생
1335년 11월 4일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
(現 북한 함경남도 금야군 흑석리)
사망
1408년 6월 27일(72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인
중풍
능호
건원릉 (現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묘호
태조(太祖)
성계(成桂) → 단(旦)
국적
가족
아버지 : 환조
어머니 : 의혜왕후 최씨
배우자 :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자녀 : 8남 5녀
종교
불교
군사 경력
복무기간
1356년 ~ 1392년
최종계급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지휘
고려 삼군도총제부
참전
쌍성부(영흥)탈환(1356년)
개경의 홍건적격퇴(1361년)
나하추(몽고족) 격퇴(1362년)
기황후(몽고족) 격퇴(1364년)
김삼선·김삼개(여진족) 격퇴(1364년)
동녕부(평양) 탈환(1370년)
개경의 왜구토벌(1377년)
지리산의 왜구토벌(1377년)
황산대첩 왜구토벌(1380년)
호바투(여진족) 격퇴(1383년)
길주의 왜구토벌(1384년)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제2차 요동 정벌(1392년)
제1대 조선 국왕
재위
1392년 7월 17일 ~ 1398년 9월 5일
즉위식
개경 수창궁
전임
-
후임
1. 개요2. 상세3. 생애4. 조선 건국5. 능원6. 묘호 및 시호7. 태조 어진8.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태조는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2. 상세[편집]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이후 존호를 더해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3. 생애[편집]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5]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10월 27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이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이성계는 특히 활을 잘 쏘았다.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이성계는 15~16세 가량의 아기발도(阿其拔都 : 아기 장수)라는 왜구 소년장수의 활약으로 고전했다. 이성계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추자 투구가 기울어졌다. 당황한 아기발도가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자, 이성계는 또 다시 투구 꼭지로 화살을 날렸고 투구가 완전히 벗겨졌다. 아기발도의 이마가 드러나자 이지란이 화살로 맞추어 죽여버렸다.

또한 황상(黃裳)과의 대결도 유명하다. 황상은 공민왕을 도와 기철을 숙청하고 홍건적에게서 개경을 탈환하여 1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예전에 원나라 순제 앞에서 활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 궁수를 모두 이겨 버린 적이 있었다. 원나라 순제가 놀라 "팔이 어떻게 생겼길래 활을 잘 쏘냐?"며 황상의 팔을 직접 만져볼 정도였다.

대결의 결과는 50발까지는 둘이 막상막하였으나, 50발이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8]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궁술과 전장에서의 그의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군왕과 군인역에서 은퇴후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여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가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이성계는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등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고, 이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4. 조선 건국[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조선 건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능원[편집]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6. 묘호 및 시호[편집]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묘호를 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시에 명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7. 태조 어진[편집]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317호이다. 현재 어진의 진본은 전라북도 전주시 경기전(慶基殿)의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사본이 국립전주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2005년에 문화재청의 국정감사에서 태조 어진의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에 보존 처리를 완료하여 전주시로 반환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2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보 지정 사유를 살펴보면,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도 조선 초기 선묘 위주의 초상화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대규모의 화면, 표제(標題)와 장황(粧䌙), 금실로 용문이 직조된 홍색의 낙영(絡纓)과 어진의 좌우에 드리워진 유소(流蘇) 등이 온전하게 구비된 상태로서 진전(眞殿) 봉안용으로서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따라서,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은 19세기 후반이라는 제작시기와 상관없이 조선 초기 어진의 원본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 한다.

더불어,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은 회화로서의 작품성 뿐만 아니라, 이 어진을 둘러싼 귀중한 기록들 - 『경기전의(慶基殿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 등도 함께 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 문헌에는 어진 제작과 관련된 도감 설치와 동원된 화가명, 소요 물품, 봉안을 위한 각 기구 간의 교신 및 각종 의주(儀註) 등 어진 제작의 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어진이 단순히 왕의 자손들이 조상의 모습을 그려 남기고 제사를 지낸다는 봉공(奉供)의 의미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조정이나 왕실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욱 지대하였음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은 예술성과 희소성, 상징성, 학술적 가치 등을 고려해 볼 때, 국보로 승격될 가치가 충분하다.

8.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