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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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 正宗 | |||
정조 어진 | |||
신상정보 | |||
출생 | 1752년 10월 28일 | ||
사망 | 1800년 8월 18일(40세) | ||
사인 | 과로 | ||
능호 | |||
묘호 | 정종(正宗, 1800년) → 정조(正祖, 1899년) | ||
휘 | 이산(李祘) 혹은 이성 | ||
국적 | |||
가족 | 친아버지 : 장조 (사도세자), 양부 : 진종 어머니 : 헌경왕후 홍씨, 효순왕후 조씨 배우자 : 효의왕후 김씨 자녀 : 문효세자, 순조, 숙선옹주 | ||
조선 왕세손 | |||
재위 | 1759년 2월 12일 ~ 1776년 3월 10일 | ||
전임 | 의소세손 정 | ||
후임 | 황세손 환 (헌종) | ||
제22대 조선 국왕 | |||
재위 | 1776년 3월 10일 ~ 1800년 6월 28일 | ||
즉위식 | 경희궁 숭정문 | ||
전임 | 영종 | ||
후임 | 순조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장조(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이며 존호는 장휘,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이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장조(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이며 존호는 장휘,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이다.
3. 생애[편집]
정조는 1752년 10월 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이 되었다.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 4월 14일(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 4월 14일(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1. 사도세자의 죽음[편집]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 상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또한 관서행,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 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
1762년(영조 38년) 윤5월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윤 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치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고, 윤숙, 권정침 등이 세자 구명을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정조의 이런한 천명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자 흉언을 유포시키던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인 장조(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추숭하였다. 그러나, 생부를 장헌으로 추숭하는 것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생부의 추도사업을 할 뜻이 없음을 함께 내비쳤다. 이는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보내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신하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홍봉한의 사형도 요구하였으나 어머니 현경왕후가 단식을 하며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장조(사도세자)의 추숭과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고 영조가 장조(사도세자)를 죽인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 역시 이 일을 언급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정조 즉위 직후 노론 측이 장조(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앞장세워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정조는 소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들의 의구심을 풀 수 있었지만, 사실상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재할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다시 추숭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뒤로 13년이 흐른 뒤였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 상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또한 관서행,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 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
1762년(영조 38년) 윤5월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윤 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치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고, 윤숙, 권정침 등이 세자 구명을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정조의 이런한 천명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자 흉언을 유포시키던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인 장조(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추숭하였다. 그러나, 생부를 장헌으로 추숭하는 것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생부의 추도사업을 할 뜻이 없음을 함께 내비쳤다. 이는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보내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신하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홍봉한의 사형도 요구하였으나 어머니 현경왕후가 단식을 하며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장조(사도세자)의 추숭과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고 영조가 장조(사도세자)를 죽인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 역시 이 일을 언급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정조 즉위 직후 노론 측이 장조(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앞장세워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정조는 소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들의 의구심을 풀 수 있었지만, 사실상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재할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다시 추숭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뒤로 13년이 흐른 뒤였다.
3.2. 세손 시절[편집]
1761년(영조 37년), 세손은 관례를 치르었다. 관례식에서는 대재학 김양택이 지은 반교문이 낭독되었는데, 나라의 맏손자로서 대통을 이을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있었다. 1762년 2월 훗날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으니 뒷날의 효의왕후이다.
1762년(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혜경궁 홍씨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1764년(영조 40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이었으나 아홉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효장세자의 빈이었던 효순왕후 역시 정조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영조 27년) 별세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양자 입적은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 즉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 김종수는 군사부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25] 또한 김종수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하들이 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후일 임금으로 즉위한 뒤에도 통치자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려 했고, 스스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었다. 정조는 사서오경에서 춘추, 진서, 한서부터 중국의 사서부터 국내의 사서와 한글소설, 의사들이 쓴 의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다.
김종수의 존재는 본인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홀로 튀는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때까지 비판 일색이었지만, 정조에 대한 김종수의 구상, 이미지메이킹은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 자신의 이론대로 김종수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들 조차도 불경한 뜻을 품은 자들이라며 공박했고, 사도세자(장조)의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노론 시파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세손일 때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소수의 노론내 인사들과 이를 극력 반대했으며,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소론 등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였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이라고 하였다. 세손 역시 사도세자와 같이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원래는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의 문관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과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고 열살 이후로는 사략, 강목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론하였고 열일곱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또 다시 별도로 강론하여 하루에 세 번의 서연을 여는 강행군이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행해졌고, 주변에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와 같은 누각들에 책을 비치하여 도서관으로 삼았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경학 못지 않게 무예의 단련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1762년(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혜경궁 홍씨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1764년(영조 40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이었으나 아홉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효장세자의 빈이었던 효순왕후 역시 정조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영조 27년) 별세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양자 입적은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 즉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 김종수는 군사부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25] 또한 김종수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하들이 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후일 임금으로 즉위한 뒤에도 통치자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려 했고, 스스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었다. 정조는 사서오경에서 춘추, 진서, 한서부터 중국의 사서부터 국내의 사서와 한글소설, 의사들이 쓴 의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다.
김종수의 존재는 본인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홀로 튀는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때까지 비판 일색이었지만, 정조에 대한 김종수의 구상, 이미지메이킹은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 자신의 이론대로 김종수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들 조차도 불경한 뜻을 품은 자들이라며 공박했고, 사도세자(장조)의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노론 시파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세손일 때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소수의 노론내 인사들과 이를 극력 반대했으며,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소론 등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였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이라고 하였다. 세손 역시 사도세자와 같이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원래는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의 문관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과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고 열살 이후로는 사략, 강목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론하였고 열일곱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또 다시 별도로 강론하여 하루에 세 번의 서연을 여는 강행군이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행해졌고, 주변에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와 같은 누각들에 책을 비치하여 도서관으로 삼았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경학 못지 않게 무예의 단련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3.3. 대리청정[편집]
노론 벽파계열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썼다. 특히 홍국영은 그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만한 자료,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고, 세손 시절 사부인 김종수는 당론에 맞서며 택군이라며 벽파를 공격했다. 한편 김종수는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또 다른 정파 청명당 혹은 청명파를 구성한다. 1772년 청명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비롯한 조정, 김치인, 정존겸, 이명식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조 또한 순감군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조 또한 순감군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
4. 사망[편집]
1800년(정조 24)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 6월 28일 유시 (양력 8월 18일 오후 5시 ~ 7시) 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죽자 어의 강명길은 죽임을 당한다.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 (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이 났다.
4.1. 사망 이후[편집]
1800년(정조 24)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 6월 28일 유시 (양력 8월 18일 오후 5시 ~ 7시) 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죽자 어의 강명길은 죽임을 당한다.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 (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이 났다.
4.2. 독살설[편집]
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을 주선한 심환지와 이시수가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독살설을 부추겼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파다하였다. 정약용은 솔피시를 지어 이러한 독살설을 은유적으로 암시했다. 그 해 8월 18일 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정약용은 여성 유배인이 현지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을 개탄한 고금도장씨녀자사를 적으면서 심환지가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를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남겼다.
5. 정치[편집]
5.1. 아동 정책[편집]
정조는 또한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시하였다."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임금님을 대하듯이 우러보아야 하며 이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은 실천 되고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
5.2. 붕당정치와 탕평책[편집]
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재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다.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처하였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였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과 의리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결국 관료, 산림,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과 의리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결국 관료, 산림,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5.3. 왕권강화와 정치개혁[편집]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였다.
5.4. 규장각[편집]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57]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學)과 두 명의 직제학(直提學)을 두었는데, 제학에는 황경원, 이복원을 임명하였고 직제학으로는 홍국영과 유언호를 임명하였다.[58] 네 사람 모두 시파로 정조의 정책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을 관여케 한 점으로 보아 규장각 설치가 처음부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9]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檢書)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류(庶類)[주해 9] 신분이었고[60],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61]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62],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59]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1788년, 정조 12년)[63] 정조의 최측근이 된다. 창덕궁에 자리잡은 내각 외에 강화도에 규장각 외각을 설치하여 왕실의 책들을 보관하는 한편[62], 제학과 직제학 이외에 직각(直閣)과 대교(待敎)를 한 명씩 더 두어 모두 6명의 각신(閣臣)을 두었다.[64] 각신들은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으며, 왕과 신하가 대화를 할 때 배석하여 대화를 기록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규장각은 기존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에서 하던 역할을 겸하는 핵심적인 기관이 되었다.[65]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초계는 본래 의정부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보고하는 제도인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40세가 되면 실제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정조 재위기간 동안 초계문신이 된 사람은 모두 138명에 이른다. 초계문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약용, 정약전 형제와 체재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있다. 정조는 초계문신이 배워야할 학문의 강목을 규정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외에도 규장각에서는 좌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발간하여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규장각의 권한이 커지고 실제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파의 반발 역시 끊임 없이 제기되었다. 1782년(정조 6년), 이택징은 상소를 올려 규장각의 각신은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며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경비를 많이 쓴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이 발호하여 자신을 해치려 하였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규장각에서 인재를 살펴 사대부를 가려뽑아 직책에 발탁하고 퇴폐한 문풍을 진착시키기 위해 규장각을 운용한 것이니 결코 폐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규장각의 설치가 근위세력 육성임을 천명한 것이다.
한편, 규장각의 검서와 초계문신 가운데는 당대에 실학을 주장한 문인들로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이들의 문체나 사상에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로 지어진 글들을 잡스럽다고 비판하였고, 문체반정을 통해 옛 문체를 지키지 않은 글을 쓴 문인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자송문을 지어 올리라는 이덕무의 권유에 “학식이 높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이나 남과 다른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 소금과 매실에게 왜 너희는 기장과 좁쌀과 같지 않느냐하고 책망하면 …… 이로 인해 천하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당시 재야에 있었으나 박제가 등과 교류가 깊었던 박지원은 “견책을 당한 사람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며 끝내 자송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진작시키고자 한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 사상의 부흥이었던 것이다.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檢書)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류(庶類)[주해 9] 신분이었고[60],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61]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62],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59]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1788년, 정조 12년)[63] 정조의 최측근이 된다. 창덕궁에 자리잡은 내각 외에 강화도에 규장각 외각을 설치하여 왕실의 책들을 보관하는 한편[62], 제학과 직제학 이외에 직각(直閣)과 대교(待敎)를 한 명씩 더 두어 모두 6명의 각신(閣臣)을 두었다.[64] 각신들은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으며, 왕과 신하가 대화를 할 때 배석하여 대화를 기록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규장각은 기존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에서 하던 역할을 겸하는 핵심적인 기관이 되었다.[65]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초계는 본래 의정부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보고하는 제도인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40세가 되면 실제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정조 재위기간 동안 초계문신이 된 사람은 모두 138명에 이른다. 초계문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약용, 정약전 형제와 체재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있다. 정조는 초계문신이 배워야할 학문의 강목을 규정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외에도 규장각에서는 좌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발간하여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규장각의 권한이 커지고 실제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파의 반발 역시 끊임 없이 제기되었다. 1782년(정조 6년), 이택징은 상소를 올려 규장각의 각신은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며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경비를 많이 쓴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이 발호하여 자신을 해치려 하였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규장각에서 인재를 살펴 사대부를 가려뽑아 직책에 발탁하고 퇴폐한 문풍을 진착시키기 위해 규장각을 운용한 것이니 결코 폐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규장각의 설치가 근위세력 육성임을 천명한 것이다.
한편, 규장각의 검서와 초계문신 가운데는 당대에 실학을 주장한 문인들로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이들의 문체나 사상에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로 지어진 글들을 잡스럽다고 비판하였고, 문체반정을 통해 옛 문체를 지키지 않은 글을 쓴 문인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자송문을 지어 올리라는 이덕무의 권유에 “학식이 높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이나 남과 다른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 소금과 매실에게 왜 너희는 기장과 좁쌀과 같지 않느냐하고 책망하면 …… 이로 인해 천하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당시 재야에 있었으나 박제가 등과 교류가 깊었던 박지원은 “견책을 당한 사람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며 끝내 자송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진작시키고자 한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 사상의 부흥이었던 것이다.
5.5. 대전통편[편집]
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년)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대전통편의 편찬에 관심을 기울이고 직접 편찬 사업에 관여, 보고를 받았다. 대전통편은 모두 723조로서, 그 가운데 이전이 2112조, 호전(戶典)이 73조, 예전이 101조, 병전이 265조, 형전이 60조, 공전이 12조 등이다. 조선의 법제는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1492년)이나 경국대전주해(1555년)와 같이 해석이 어려운 조항에 주를 달거나 판례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정비되어 오다가, 영조 대인 1746년에 이르러 경국대전 가운데 영구히 지킬것을 가려 속대전을 만들었다. 속대전에는 탕평책 추진으로 인한 권력구조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을 만들면서 각각의 조항에 대해 경국대전의 것은 원, 속대전의 것은 속, 그 이후에 재정한 조항은 증으로 표시하는 한편, 폐지한 조문도 그대로 실으면서 그 아래에 금폐라 표기하였다. 대전통편은 새롭게 도입한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가 한층 강화된 법령이었다. 대전통편 은 이후 고종 2년(1865년) 대전회통이 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5.6. 서한 정치[편집]
정조는 조정의 중신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어 막후에서 정치를 조정하였다. 정조가 보낸 편지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채제공, 조심태, 홍낙임, 심환지 등에게 보낸 것이 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 문제를 논의하고, 상소로 제기된 민감한 현안이나 인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가하면, 자신의 건강 상태, 신하의 대소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정조의 편지는 대부분 직접 쓴 것으로 봉인하여 비밀리에 보냈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 지목하며 문체반정을 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편지글에서 비속어, 속담, 욕설, 이두 등을 가감없이 사용하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 지목하며 문체반정을 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편지글에서 비속어, 속담, 욕설, 이두 등을 가감없이 사용하였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