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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r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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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생애

1. 개요[편집]

송해(宋海, 1927년 4월 27일~2022년 6월 8일)는 대한민국의 가수, 희극 배우이자 방송인, 황해도 재령군 출신의 실향민이다. 음악 경연 TV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34년간 맡아서 사회자(TV presenter)로 활동했다.

2. 상세[편집]

대한민국의 최고령 가수, 희극 배우로 1955년 창공 악극단으로 데뷔한 이래 2022년 95세로 고인이 될 때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였다.[3][4] 2022년 6월 8일 오전 8시 30분경 서울 도곡동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딸에 의해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현장에서 사망이 확인된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오전 8시 45분, 병원에서 사망이 공식 확인되었다. 송해는 2023년 1월과 5월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3월에는 코로나-19에 확진되기도 했다. 6월 10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 KBS를 거쳐 경북 김천시 소재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고인의 유해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546(송해공원 인근)에 안장되었다.

2022년 초 건강상 이유로 '전국노래자랑' 하차를 고민하기도 했고, 제작진과 스튜디오 녹화로 방송에 계속 참여하는 방안 등을 논의해 왔으나 이후 야외 녹화로 프로그램 제작 일정이 정해지면서 임시 하차 후에 다시 진행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야외 녹화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단독 MC였던 송해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정식 진행자가 정해질 때까지 작곡가 이호섭과 KBS 아나운서 임수민의 더블 MC 체제로 프로그램이 편성되었다.

3. 생애[편집]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면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은진 송씨이다. 1949년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에 입학해 공연을 시작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이듬 해 1.4 후퇴 당시 미군의 탈출선을 타고 월남했다. 송해는 당시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몇 차례씩 동네 산자락으로 올라가 피신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3번째로 피신했을 때 상황이 악화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쪽으로 향하는 탈출선에 오르게 되었다. 송해의 모친은 집을 떠나는 송해에게 "얘야, 이번에는 조심하렴" 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모친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으며, 송해는 2015년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에서 이 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가사를 실었다. 탈출선을 타고 내려오며 지금의 '송해'(宋海)라는 예명을 지었는데 월남 과정에서 타고 있던 선박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와 같은 세상을 품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부산에 도착한 송해는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휴전 때까지 통신병으로 복무했으며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의 통신문을 모스 부호로 전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5]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할 당시 군대 선임 상사의 여동생 석옥이 여사를 처음 만났고, 이듬해에 결혼하였다.

제대한 직후인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으며, 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 배우로 데뷔했다. 이 후 196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 MC로 전환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인기를 얻었다. 구봉서, 배삼룡, 이주일, 남성남 등과 함께 1970~1980년대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과 방송 MC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대까지는 TBC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TBC가 강제 폐국된 이후에는 KBS 2TV로 넘어와 활동하였다.

송해는 동양방송 - KBS 제2라디오에서 아침 교통 라디오 방송 <가로수를 누비며> 를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7년 동안 진행했다. 하지만 1986년에 자신의 외아들 송창진이 한남대교(당시에는 제3한강교)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큰 충격을 받아 잠시 방송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가로수를 누비며> 역시 3년 뒤인 1989년에 완전히 하차했다. 송해는 외아들의 사고사 이후, 2022년 6월에 타계할 때까지 평생 한남대교 근처로 다니지 않았다.[7] <가로수를 누비며>에서 하차한 것도 아들의 사고사 이후 기사들의 안전 운전을 독려하는 교통방송을 진행하는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