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조선 태종의 왕자 양녕대군 | 讓寧大君 | |||
양녕대군의 묘 | |||
신상정보 | |||
출생 | 1394년 | ||
사망 | 1462년 11월 8일 (향년 68세) | ||
묘소 | |||
국적 | |||
휘 | 이제 (李禔) | ||
시호 | 강정 (剛靖) | ||
가족 | |||
기념 조형물 | |||
조선 왕세자 | |||
재위 | 1404년 9월 19일 ~ 1418년 7월 15일 | ||
전임 | |||
후임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그는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 성은 이, 휘는 제, 자 후백, 시호는 강정이다. 조선 효령대군, 세종, 성녕대군의 첫째 친형이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이후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부왕 태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가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 의정부좌의정 광산군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이후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부왕 태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가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 의정부좌의정 광산군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3. 생애[편집]
3.1. 출생과 왕자 시절[편집]
양녕대군은 1394년에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양녕대군도 태어나기 전 형 3명이 있었는데, 조선을 건국하기 전 모두 사망하여 양녕대군이 장남이 되었으며 곧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그 해 4월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1]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7년(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 그해 9월 25일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1]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7년(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 그해 9월 25일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3.2. 세자 시절[편집]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8년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3.3. 세자 폐위[편집]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1]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3.4. 세자 폐위 이후[편집]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군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조카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하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조카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하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4. 사망[편집]
1462년(세조 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시와 서에 능하였으며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5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 곤좌간향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양녕로 167)이다. 사후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
사후 그는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 중 상당수가 인멸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년(세조 2년)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까지 언급되며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숙종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사당을 발견함으로써 복권되고 사당 개수의 명이 내려졌다.
후일 1966년 1월 소설가 박종화가 그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양녕대군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여 1968년 12월 31일까지 연재하였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5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 곤좌간향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양녕로 167)이다. 사후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
사후 그는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 중 상당수가 인멸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년(세조 2년)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까지 언급되며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숙종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사당을 발견함으로써 복권되고 사당 개수의 명이 내려졌다.
후일 1966년 1월 소설가 박종화가 그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양녕대군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여 1968년 12월 31일까지 연재하였다.
5. 평가[편집]
김시양은 평가하기를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차례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세종이 여러 번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형제간의 지극한 정의가 이를 데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내외(內外)ㆍ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고,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고 거의 매일 서로 즐겼다. 여러번 잔치하는 기구를 주셨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세종이 여러번 성 밖으로 나가 청하니, 지극한 정의가 무간(無間)하였다. 세조(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양녕은 능히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하였고, 세조도 혐의없이 높이 대우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고,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을 더욱 어렵다 하였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