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논란 및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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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3.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4.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은폐 의혹5. 유관순 우상화 배경 관련 의혹6.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유관순논란및 의혹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2.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편집]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 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 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유관순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과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는 '유관순이 6년형을 받았다'고 말한 반면, 조병옥의 동생 조병호는 '부친(조인원)이 유관순과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실제로는 그의 숙부 유중무와 같은 5년형)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에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그 내용이 공개됨으로써 유관순의 1심 선고형은 '징역 5년'임이 확인되었다.

3.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편집]

유관순 사후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근거로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2011년에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라는 책을 통해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개신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유관순은 개신교계의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선교 전략에 활용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4.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은폐 의혹[편집]

광복 직후인 1940년대 후반에 열사의 시신이 토막 참살되었다는 소문이 퍼뜨려졌으나, 2011년에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의 운동가들'에 따르면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는 "나는 그녀의 온전한 몸에다 수의를 입혔다"고 밝혔다. 열사의 사인은 구타 등 고문 후유증이었다.

5. 유관순 우상화 배경 관련 의혹[편집]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 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잔 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사망한 사람은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는 비판도 있다.

6.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