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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32년 2월 22일 | |
대영 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얼랜드 | ||
사망 | 1799년 12월 14일 (향년 67세) | |
버지니아주 마운트 버넌 | ||
국적 | ||
가족 | 아버지 : 어거스틴 어머니 : 메리 볼 워싱턴 배우자 : 마사 워싱턴 | |
소속 정당 | ||
종교 | 성공회 (표면상) | 이신론 (실질적) | |
병역 | ||
복무 기간 | 1753년 ~ 1789년 4월 22일 | |
최종 계급 | 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명예역 미국 대원수(추서) | |
참전 | 미국 독립 전쟁 | |
미국의 초대 대통령 | ||
임기 | 1789년 4월 30일 ~ 1797년 3월 3일 | |
부통령 | 존 애덤스 | |
후임 | 존 애덤스 (제 2대) |
1. 개요[편집]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2. 상세[편집]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해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뒤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 삶을 영위하였다.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는 불간섭주의 정책을 택했다. 특히 유럽에서 발발한 대 프랑스 동맹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에는 중립을 고수했다. 1794년 워싱턴은 전쟁을 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정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가담하는 것 등에 대해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 덕목을 강조하였다.
헌법에 대통령의 임기 제한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3선 권유를 거절한채 1797년에 퇴임함으로 2선 연임의 관례가 생기게 되었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해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뒤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 삶을 영위하였다.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는 불간섭주의 정책을 택했다. 특히 유럽에서 발발한 대 프랑스 동맹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에는 중립을 고수했다. 1794년 워싱턴은 전쟁을 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정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가담하는 것 등에 대해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 덕목을 강조하였다.
헌법에 대통령의 임기 제한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3선 권유를 거절한채 1797년에 퇴임함으로 2선 연임의 관례가 생기게 되었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3.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