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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천안함 피격 사건
발생 국가
발생일
2010년 3월 26일(+5291일, 14주기)
발생 위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인근 해역
원인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서 격침
인명
피해
전사
46명[1]
부상
58명
1. 개요2. 상세3. 침몰 원인
3.1. 북한 측의 반박3.2. 대한민국 국방부의 반박
4. 인명피해
4.1. 실종자 수색 및 천안함 인양4.2. 사망자 가족협의회4.3. 영결식
5.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천안함 피격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 772 천안이 조선인민군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서 격침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조사하여 2010년 5월 20일에 "천안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기자가 스웨덴 관계자에게 질의하자 자신들은 "조사에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조사 결과 발표는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으나 "자신들과 관련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반영한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공격 주체를 특정하지 않은 채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하였다.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특대형 모략극"이라며 반발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안보리 성명을 사실상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천안함의 침몰에서 인양, 조사 발표까지 대한민국 사회와 주변국의 관심을 끌었으며, 침몰 원인에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고 규명과정에서 언론과 각계 인사들은 다수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침몰 원인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으로 갈등을 빚었다.

3. 침몰 원인[편집]

침몰해역에서 수거된 어뢰 추진동력장치와 선체의 변형형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부상자 상태 및 시체검안, 지진파 및 공중음파 분석, 수중폭발의 시뮬레이션, 백령도 근해 조류분석, 폭약성분 분석, 수거된 어뢰부품들의 분석 결과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에서 발사된 250kg급 감응어뢰 ‘CHD-02D’에 의해 천안함 피격
  •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되어 침몰했다.
  • 폭발위치는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정도이다.
  • 무기체계는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폭약 250kg규모의 CHT-02D 어뢰로 확인되었다.

3.1. 북한 측의 반박[편집]

합동 조사단의 공식 발표에 대해 북한은 강렬히 반발하며 이번 사건은 자신들과 무관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며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정부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전쟁국면을 간주해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5월 28일 북한은 외신들과 각국 대사관 관계자들을 초대해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천안함이 자신들과 무관함을 주장했다.북한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북한은 130t 연어급 잠수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 북한은 어뢰 수출관련 무기소개 책자를 배포하지 않았다.
  • 북한은 '호'라는 표현을 쓰지 '번'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으며 번호를 매길때 매직으로 쓰지 않고 기계로 새긴다. 또한 합조단의 주장대로 함선 공격에 250kg 정도의 폭약량이 사용됐다면 어뢰추진체 후부의 온도는 낮게는 325°C, 높게는 1000°C 이상 올라갈 수 있고 이 정도 온도면 잉크가 완전히 타버린다.
  • 대한민국은 가스터빈실을 공개해야 하며 뇌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터빈이 없어졌을 것이다.
  • 합조단에 참여한 국가가 미국과 '북한 관련설'에 동조한 나라들로만 구성되었다. 외부와 차단된 체 제한된 조사만 했고 반대자를 추방했다.
  • 합조단이 제시한 어뢰의 재질 알루미늄은 북한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며, 강철합금재료로 만든 주체어뢰를 사용한다. 해군이 보유한 주체어뢰의 어뢰강철합금편을 남측에 직접 넘겨줄 용의가 있다.
  • 어뢰추진체에선 폭약성분이 나오지 않았다.
  •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는 암초가 많은데 천안함 관련 자료들이 좌초가 침몰 원인임을 입증하고 있다.

7월 20일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남한 정부가 억지로 천안함사건을 북한과 연계시키려 시도했다"며,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국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북한은 천안함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9월 30일 북한의 박길연 외무성 부상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천안함 사건을 이용해 미국과 남한이 한반도와 주변지역에서 무력 군사위협을 벌이는 점을 들어 "미국은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라고 비판했다. 박길연은 또 "남한 정부의 일방적 수사결과가 나온 이후 남한 안팎에서 다양한 비판이 야기되고 있고, 군사과학적 관점에서도 여러 의문을 낳고 있다"며 남한 정부가 객관적인 조사를 위한 조사단 파견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현안 해결을 위해 남북대화에 즉각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11월 5일 주러시아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는 러시아 언론들을 상대로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은 천안함 침몰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3.2. 대한민국 국방부의 반박[편집]

대한민국 국방부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설명자료를 내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이 제시한 주장을 분석해보면 한국의 일부 정치권과 인터넷 괴담을 인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주장은 신뢰성이 없으며 반박은 되레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 2006년 9월에 촬영된 구글어스 사진에는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 3척이 나타나며 "북한의 130t급 잠수정은 지난 2003년 중동국가(이란)에 수출한 사례를 확인했고 북한에 있는 130t급 잠수정이 식별된 영상정보 사진(정찰위성 사진)도 갖고 있다"
  • 북한의 무역회사에서 작성해 제3국에 제공한 어뢰설계도가 포함된 무기 소개 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천안함을 공격한 신형 'CHT-02D' 어뢰 외에 2개의 신형 어뢰가 설계도면과 함께 상세히 등재돼 있다.
  • 탈북자의 증언과 북한 '조선국어대사전' 등을 확인한 결과 북한에서 '호'와 '번'이 모두 쓰이고 있으며 2003년 입수한 북한 시험용 어뢰에도 4호라는 수기로 기록된 표기만 있었을 뿐 북한이 주장했듯이 기계로 새긴 것은 없다.
  • 대한민국 국방부는 가스터빈실 인양사진을 공개하면서 가스터진실 발전기, 조수기, 유수분리기, 가스터빈 덮개가 파손되었고 가스터빈도 파손되었다고 설명했다. 연소실과 압축기 일부만 남고 공기 흡입관과 파워터빈 및 폐기관은 유실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 "합동조사단에 참가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이며 이중 스웨덴은 중립국"이며 "조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유지를 위해 외부의 압력을 배제했고, 모든 조사결과는 조사에 참여한 모든 조사관들의 의견을 종합해 만장일치로 확인했다"고 일축했다.

4. 인명피해[편집]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조선인민군 어뢰에 의해 폭침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한 인천해양경찰서 소속 해안경비정에 의해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으며 나머지 46명은 실종되었다. 이후 실종자 수색과 선체 인양이 진행되면서 2010년 4월 24일 17시 기준으로 실종자 46명 중 40명이 사망자로 확인되었으며 6명이 실종자로 남아 있다.

한편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수색과정에서 3월 30일에는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작업 중 실신하여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순직하였다. 김현진 상사, 김정호 상사는 실신해 치료를 받았다. 4월 2일에는 저인망어선 금양98호가 천안함 실종자 수색을 마치고 조업구역으로 복귀하던 중 서해 대청도 서쪽 55km 해상에서 침몰해 탑승 선원 9명 중 2명이 숨지고 7명이 실종됐다.

사고 원인은 초기에는 어뢰설, 기뢰설, 내부폭발설, 피로파괴설, 좌초설 등 다양했으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북한의 뇌격으로 좁혀졌다. 당초 정부와 민군 합동조사단은 뇌격설과 좌초설의 가능성을 조사했었다.

4.1. 실종자 수색 및 천안함 인양[편집]

대한민국 해군은 27일 오전 수상함 10여 척과 해난구조함 평택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력을 사건 지점에 배치했다. 사건 지점에 배치된 100여 명의 해군 해난구조대(SSU) 잠수 요원들은 선체의 구멍을 조사했다.

3월 28일에는 실종자 수색을 위해 광양함을 추가로 배치했다. 수색 과정에서 대한민국 해군은 침몰 지점으로부터 서남방 16마일 부근에서 구명복 상의 22개와 안전모 15개를 발견했다. 해군 SSU, UDT 대원들과 육군 특전사의 잠수요원들이 수색,구조작업에 투입되었다.

3월 29일 밤, 아시아 최대의 수송함인 독도함을 침몰한 천안함의 탐색 및 구조 활동을 지휘하기 위해 현장 해역에 긴급 투입했다.

3월 31일 함수쪽을 수색한 잠수사는, 격실 안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증언했다.

4월 2일 수색작업을 돕던 쌍끌이 어선 금양98호가 22시 30분쯤 조난신호를 보낸 뒤 실종됐다. 이 배는 캄보디아 화물선과 충돌하여 침몰해 탑승 선원 전원이 숨졌다.

4월 3일 천안함에서 시신 2구를 발견했는데, 그중 한 명은 남기훈 상사로 확인됐다. 4월 3일 실종자 가족 측이 실종자 수색 작업을 중단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며, 해군은 실종자 가족 측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4월 7일 함미 절단면에서 김태석 상사가 발견되었다.

4월 30일, 백령도 용트림바위 앞 부표에서 목적이 알려지지 않은 수색 작업을 하던 UDT 대원 한주호 준위가 작업 도중 실신해 후송 치료 중 사망, 순직했다.

4.2. 사망자 가족협의회[편집]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은 2010년 3월 30일에 전체회의를 통해 46명의 천안함 실종 장병 가족당 1명씩의 대표를 뽑아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약칭 천실협)를 구성하였으며, 이 가운데 15 ~ 20명으로 실무단을 구성했다. 실종자 가족협의회는 발족 기자회견에서 △실종자 전원의 구조를 위해 마지막 1인까지 최선을 다할 것 △현재까지 진행된 해군과 해경의 초동대처 과정과 구조작업 과정에 대한 모든 자료를 공개할 것 △가족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할 것 등을 해군에 요구했다. 실종자 가족협의회 대표는 고 최정환 중사의 매형 이정국 씨가 맡아 활동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장교는 7명(중령1, 소령1, 대위2, 중위3) 전원 구조된 것에 대해 지휘책임 회피문제를 제기했다. 함장 최원일 중령은 “선체의 구조상 장교들이 머무는 작전상황실이 선두에 위치했고 선미만 가라앉은 사고였기 때문에 장교들은 모두 무사한 것이며 자신도 초계함이 침몰할 당시 약 5분 동안 함장실에 갇혀 있어서 부하들이 함장실 문을 부수고 나서야 함장실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는 이미 선미부분이 침몰하고 난 이후였다”고 진술했다.

최원일 중령이 작전상황도를 검토하고 있던 도중 사고가 발생하여 최원일 함장이 함장실에 갇혀 있게 된 것을 부함장 김덕원 소령이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문을 부수고 최원일 중령을 구조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당시 초계함의 모든 전력이 차단되어 정전상태였기 때문에 함장인 최원일 중령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이용하여 사고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는 2010년 4월 21일에 평택 제2함대 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가족 전체회의를 통해 직계 가족으로 이뤄진 새 가족대표단 '천안함 전사자 협의회'(약칭 천전협)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새로 조직된 천전협은 천안함 희생·실종자 가족당 직계가족 1명씩이 대표로 참여해 모두 46명으로 구성됐으며, 실무단을 따로 뽑지는 않았다. 천전협과 함께 5인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어서 군과 장례절차를 협의하였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은 2010년 3월 30일에 전체회의를 통해 46명의 천안함 실종 장병 가족당 1명씩의 대표를 뽑아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약칭 천실협)를 구성하였으며, 이 가운데 15 ~ 20명으로 실무단을 구성했다. 실종자 가족협의회는 발족 기자회견에서 △실종자 전원의 구조를 위해 마지막 1인까지 최선을 다할 것 △현재까지 진행된 해군과 해경의 초동대처 과정과 구조작업 과정에 대한 모든 자료를 공개할 것 △가족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할 것 등을 해군에 요구했다. 실종자 가족협의회 대표는 고 최정환 중사의 매형 이정국 씨가 맡아 활동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장교는 7명(중령1, 소령1, 대위2, 중위3) 전원 구조된 것에 대해 지휘책임 회피문제를 제기했다. 함장 최원일 중령은 “선체의 구조상 장교들이 머무는 작전상황실이 선두에 위치했고 선미만 가라앉은 사고였기 때문에 장교들은 모두 무사한 것이며 자신도 초계함이 침몰할 당시 약 5분 동안 함장실에 갇혀 있어서 부하들이 함장실 문을 부수고 나서야 함장실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는 이미 선미부분이 침몰하고 난 이후였다” 고 진술했다.

최원일 중령이 작전상황도를 검토하고 있던 도중 사고가 발생하여 최원일 함장이 함장실에 갇혀 있게 된 것을 부함장 김덕원 소령이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문을 부수고 최원일 중령을 구조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당시 초계함의 모든 전력이 차단되어 정전상태였기 때문에 함장인 최원일 중령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이용하여 사고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는 2010년 4월 21일에 평택 제2함대 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가족 전체회의를 통해 직계 가족으로 이뤄진 새 가족대표단 '천안함 전사자 협의회'(약칭 천전협)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새로 조직된 천전협은 천안함 희생·실종자 가족당 직계가족 1명씩이 대표로 참여해 모두 46명으로 구성됐으며, 실무단을 따로 뽑지는 않았다. 천전협과 함께 5인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어서 군과 장례절차를 협의하였다.

4.3. 영결식[편집]

2010년 4월 29일,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 날 영결식에는 2800여 명이 참석해 천안함 장병들을 애도했다.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인근의 원정초등학교는 영결식이 열린 4월 29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교생이 묵념을 올렸다. 원정초등학교에는 천안함 희생 장병의 일부 자녀들도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결식은 국기경례 → 묵념 → 경위보고 → 화랑무공훈장 추서 → 조사 → 추도사 → 종교 의식 → 주요 인사 헌화 → 조총 발사 순으로 진행되었다.[75] 희생 장병 46명(산화자 6명은 유품)은 국립대전현충원의 사병3묘역에 안장되었다. 또한 인근에서 수색작업을 벌이다 사망한 한주호 준위도 묘역 인근에 안장되었다.

5.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40명 전사, 6명 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