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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淸海鎭海運 歲月號 沈沒 事故
Sinking of MV Sewol
발생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1]
사고일로부터 +3873일, 10주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동거차도리 인근 해상
(위도#북위 34°13'5.16"
동경 125°57'00") 참조.[2]
사고선박
청해진해운 세월호
출발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경[3]
인천항 연안부두|연안 여객터미널
도착 예정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경[4][5]
제주항 연안 여객터미널
유형
침몰
원인
/침몰 원인#s-1|확증 불가
탑승 인원
476명(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인명피해
사망
299명(단원고 학생 248명, 교사 10명)[6][7]
미수습
5명(단원고 학생 2명, 교사 1명)[8][9]
구조
172명(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10]
재산 피해
약 6,000억 원 이상
동원
인원
약 700여 명으로 추정
장비
수상오토바이, 제트보트, 헬기, 민간 어선
1. 개요2. 사고 상세3. 사고 상황
3.1. 구조 현황3.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

1. 개요[편집]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전체 탑승자 476명)이 사망·실종된 대형 참사다.

2. 사고 상세[편집]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우리 역사에 지우기 힘든 아픈 상처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막중한 책임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하나로 단합해서 위기를 극복한 저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좌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들과 비정상을 바로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명운을 걸 것입니다.[11]

박근혜 대통령 (2014년 05월 19일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에서 수많은 갈등을 야기한 증폭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되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가진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탑승하였으며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대형 참사였다. 이 참사로 피해 학생이 집중된 경기도 안산시와 전라남도 진도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국민들의 사회적 충격이 매우 컸던 국가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 이후 대한민국은 갈등과 분열 등 엄청난 후폭풍이 닥쳤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고였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소문난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놓은 전환점이 된 대사건이다.

대한민국의 해난사고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269명이 사망한 창경호 침몰 사고와 362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 사고와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 5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의 사건들과 달리 21세기에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이 사고는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다.

대한민국의 수학여행 사건 사고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 학교의 학년 전체가 참사를 당한 것 또한 최초이다.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다.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가 일어난 지 약 9개월 만에 또 다시 학교 단체 캠프에서 사고가 나면서, 태안 때부터 거론되던 수학여행 규제 강화 및 중단이 이 사고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2014년 한 해 동안은 수학여행 및 학교 단체 여행이 금지되거나 자제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사고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참사는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발생하면서 사망자의 90%가 같은 학교 소속, 83%가 미성년자였다. 단원고의 주소지인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현장인 전라남도 진도군은 이 사고 때문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 선박연령 규제 완화로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 선박인 세월호의 수입 운항,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를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 안내 방송,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선진적이지 못한 대처 등 총체적 난국이었던 최악의 해난 사고이다.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차량 150여 대와 승무원 29명, 화물 기사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중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에 발표된 해운사의 브리핑에서는 탑승자가 477명이라 했지만, 오후 브리핑에서 승선권과 탑승자 명부를 조회한 결과 462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23시경 해운사는 475명으로 총 인원수를 정정하였다. 이번엔 CCTV로 탑승자를 일일이 헤아렸다고. 그러다가 4월 18일 오후 10시경에는 476명으로 정정되었다. 외국인은 중국인 2명을 포함하여 총 5명이 탑승했으며, 필리핀 가수 2명은 구조되었으나 중국인 2명과 러시아 출신 학생은 4월 21일 수색 작업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출신 학생은 단원고에 재학 중이던 유학생인데,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으로 수영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반복되면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위 '말 잘듣는 학생들(승객들)'이 죽는 결과가 되어 안타까움과 공분이 더 컸다. 이 방송은 누가, 왜 했는지, 이후 탈출지시는 왜 안했는지 등등이 핵심 쟁점중 하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재난사고에서 방송이나 담당자의 말을 불신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처럼 선장이 튀었음에도 승객이 전원 구조된 사례를 본 사건과 견주어 보려는 시각도 있으나, 사건의 경위 차이가 상당한 시점에서 섣부른 추측 및 비판은 삼가야만 한다.

세월호 침몰 1년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한 달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전 3월 27일의 모습. 이것이 멀쩡한 세월호의 마지막 모습이다.[12]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 측 인사인 '해경 123정' 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의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대법원에 최종적으로 유죄(징역 3년)로 결론났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인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에서 간단하게 대피 방송만 했어도 인명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거란 법원의 판단이며, '부실한 구조 행위'로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후에 야기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과 박근혜 정부의 비참한 몰락도 결국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었지만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세월호 참사였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무한 책임을 정부와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세월호 참사 직후 석연찮은 7시간 30분의 행보와 미용시술 논란, 그리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가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탄압 등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지지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였다. 결국엔 정부를 파멸로 이끌 만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서(세월호 7시간 및 생명권 침해) 탄핵안에 포함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판결하면서 이를 직접적인 탄핵 사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심각한 재난 상황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구조 활동 등에 참여할 의무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으며, 직무의 성실성 같은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탄핵 사유로 직접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판시된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탄핵 사유로 인정되었다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은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면 직접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탄핵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버리는 셈이므로, 정치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다른 판례들을 종합해봤을 때 직무불성실로 탄핵감이 되려면 말 그대로 그 어느 액션도 안 하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에 준하는 상태로 있었을 거라는 의심이 되지만, 탄핵 판결 당시에는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한 명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중대본으로 출석하거나 어떠한 지시를 내린 흔적이 확인되는 상황에서는 직무불성실 등을 문제삼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 의견으로서 당시 박근혜의 태도를 지적했다.[25]

2023년 4월 16일로 참사 9주년, 희생자 9주기를 맞는다. 또한 2022년 7월 3일부로 참사 3000일을 맞았다.

3. 사고 상황[편집]

세월호 72시간의 기록.

사고 과정과 구조, 수습 과정, 오보 및 이후 정정 과정 등의 타임라인이 잘 나와 있다. 여기서 사고 초기 대통령 지시는 후에 박근혜 정부 측 조작으로 밝혀진다.

우측 하단에 세월호가 시간에 따라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

3.1. 구조 현황[편집]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발생시각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추정)[13]
유형
발생위치
운항 중 침몰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동거차도 맹골 수도|인근 해상
탑승인원
구조
일반인: 151명
단원고교생: 325명
일반인: 97명
단원고교생: 75명
사망
미수습
일반인: 51명
단원고교생: 248명
일반인: 3명
단원고교생: 2명
기종
여객선|연안 여객선
총합
탑승: 476명
사망: 299명
미수습: 5명
구조: 172명
출처

(2017년 6월 5일 17:42 기준, 단위: 명)
  •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현황에는 단원고의 교사를 제외한다.
  • 2014년 4월 22일 이후로 사망자 중에서 탑승 명단에 없는 사람들도 발견되었으나, 공식적인 탑승객 명부의 인원수는 476명에서 변경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사실상 총인원수는 476+α인 상황.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승선원 명부의 정확성 문제, 차량탑승 미신고자 등 여러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탑승객 숫자는 언제나 변동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
  • 단원고 사망자의 수는 2017년 6월 2일자 기준으로 갱신되었다. # 학생 피해 집계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 실제 파악 인원과 차이가 날 수 있다.
  • '단원고'는 단원고 학생뿐만 아닌 선생님들도 포함된다.
  • '일반인'은 일반 승객뿐만 아닌 세월호 승무원도 포함된다.
  • '사망'은 시신이 발견된 경우, '미수습'은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경우이다.
  • 11월 21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당일 25대의 헬기의 수색/구조 현황을 시각화로 정리했다. 시각화 사이트는 링크 참고. #

3.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편집]

연합뉴스 측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지와 같이 선실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도면상으로 확인되는 선실 절반의 출입구 방향이 선체가 기울어진 쪽 반대 방향이다.

선체가 90도 이상 기울면서 출입구 쪽 벽면이 천장으로 바뀌었고, 아래 후술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피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배의 창문을 깨는 등으로 출구를 확보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구조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승객들이 창문을 깨기 위해서 의자로 유리창을 내려쳤지만 결국 깨지 못했듯, 여객선의 창문을 일반인이 주위의 물건으로 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탈출 선원들 "구조순서 밀릴라"...승객대피 안 시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휴가 중이었던 선장은 선박의 복원력이 저하됐다고 사측에 의견을 제시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는 전했다.
[1] <여객선침몰> 세월호, 막판에 항로 급히 바뀌어(종합).[2]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위치는 세월호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장소이며, 침몰을 시작하기 시작한 지점은 조금 더 아래쪽이다. 자세한 것은 세월호 이동경로를 기록한 구글 지도 참조.[3] 본래 예정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지만 안개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면서 9시 정도에 출발하였다.[4] 도착 예정 시간을 1시간 조금 넘게 앞두고 사고가 발생했다.[5] 사고 전 정오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방송이 나왔다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다.[6] 희생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1997년생~빠른 98년생이다.[7] 미수습자를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사망자는 전체 304명, 이들 중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 사망.[8] 이들 모두 언론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단원고 학생은 남현철·박영인 군, 교사는 양승진 교사, 일반 승객이었던 권재근·혁규 부자 2명.[9]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미수습자이다. 물론 사망했다고 볼 수 있으나, 사망 선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시체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민법상 실종자로 분류된다. 민법 제27조 제2항에 의하여, 사고 발생 후 1년이 지난 때부터 유족 등이 사실상 사망에 준하는 실종 선고를 법원에 청구할 수는 있다.[10] 당시 단원고의 교감은 구조 되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했다.[11] 담화 내용으로는 해경 해체, 해산 및 각 부처 신설, 부패 청산, 법 개정안 등 강도 높은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역대 대통령 담화 중에서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사고 당시 온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가득차 있었음을 의미했다.[12] 심지어 마지막 링크의 블로그 글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1시간 40분 전에 업로드된 글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블로거는 침몰 3주 전에 탑승했던지라 무사했다.[13] 참고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에선 1분 빠른 8시 49분으로 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