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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1주기
D-356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淸海鎭海運 歲月號 沈沒 事故
Sinking of MV Sewol
발생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1]
사고일로부터 +3662일, 10주기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 동거차도리 인근 해상
(위도#북위 34°13'5.16"
동경 125°57'00") 참조.[2]
사고선박
청해진해운 세월호
출발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경[3]
인천항 연안부두|연안 여객터미널
도착 예정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경[4][5]
제주항 연안 여객터미널
유형
침몰
원인
침몰 원인확증 불가
탑승 인원
476명(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인명피해
사망
299명(단원고 학생 248명, 교사 10명)[6][7]
미수습
5명(단원고 학생 2명, 교사 1명)[8][9]
구조
172명(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10]]의 교감은 구조 되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재산 피해
약 6,000억 원 이상
동원
인원
약 700여 명으로 추정
장비
수상오토바이, 제트보트, 헬기, 민간 어선
관련 단체
1. 개요2. 사고 상세3. 사고 원인4. 사고 상황
4.1. 구조 현황4.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
5. 관련 수사6.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점
6.1.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6.2. 진도 VTS 관제 허술, 초기 대응시간 허비6.3. 선장 및 대다수 선원들의 무책임함6.4. 허둥댄 정부, 초동 대처 실패6.5. 뒤늦은 구조 작업 돌입
7. 반응 및 여파
7.1. 대한민국
7.1.1. 중앙정부7.1.2. 단원고등학교7.1.3. 대한민국 국민들7.1.4. 방송사7.1.5. 영화계7.1.6. 학계
7.2. 타 국가의 반응7.3. 세월호 노란 리본
8. 여담9.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전체 탑승자 476명)이 사망·실종된 대형 참사다.

2. 사고 상세[편집]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우리 역사에 지우기 힘든 아픈 상처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막중한 책임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하나로 단합해서 위기를 극복한 저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좌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들과 비정상을 바로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명운을 걸 것입니다.[11]

박근혜 대통령 (2014년 05월 19일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에서 수많은 갈등을 야기한 증폭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되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가진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탑승하였으며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대형 참사였다. 이 참사로 피해 학생이 집중된 경기도 안산시와 전라남도 진도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국민들의 사회적 충격이 매우 컸던 국가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 이후 대한민국은 갈등과 분열 등 엄청난 후폭풍이 닥쳤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고였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소문난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놓은 전환점이 된 대사건이다.

대한민국의 해난사고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269명이 사망한 창경호 침몰 사고와 362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 사고와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 5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의 사건들과 달리 21세기에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이 사고는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다.

대한민국의 수학여행 사건 사고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 학교의 학년 전체가 참사를 당한 것 또한 최초이다.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다.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가 일어난 지 약 9개월 만에 또 다시 학교 단체 캠프에서 사고가 나면서, 태안 때부터 거론되던 수학여행 규제 강화 및 중단이 이 사고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2014년 한 해 동안은 수학여행 및 학교 단체 여행이 금지되거나 자제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사고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참사는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발생하면서 사망자의 90%가 같은 학교 소속, 83%가 미성년자였다. 단원고의 주소지인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현장인 전라남도 진도군은 이 사고 때문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 선박연령 규제 완화로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 선박인 세월호의 수입 운항,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를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 안내 방송,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선진적이지 못한 대처 등 총체적 난국이었던 최악의 해난 사고이다.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차량 150여 대와 승무원 29명, 화물 기사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중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에 발표된 해운사의 브리핑에서는 탑승자가 477명이라 했지만, 오후 브리핑에서 승선권과 탑승자 명부를 조회한 결과 462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23시경 해운사는 475명으로 총 인원수를 정정하였다. 이번엔 CCTV로 탑승자를 일일이 헤아렸다고. 그러다가 4월 18일 오후 10시경에는 476명으로 정정되었다. 외국인은 중국인 2명을 포함하여 총 5명이 탑승했으며, 필리핀 가수 2명은 구조되었으나 중국인 2명과 러시아 출신 학생은 4월 21일 수색 작업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출신 학생은 단원고에 재학 중이던 유학생인데,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으로 수영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반복되면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위 '말 잘듣는 학생들(승객들)'이 죽는 결과가 되어 안타까움과 공분이 더 컸다. 이 방송은 누가, 왜 했는지, 이후 탈출지시는 왜 안했는지 등등이 핵심 쟁점중 하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은 재난사고에서 방송이나 담당자의 말을 불신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처럼 선장이 튀었음에도 승객이 전원 구조된 사례를 본 사건과 견주어 보려는 시각도 있으나, 사건의 경위 차이가 상당한 시점에서 섣부른 추측 및 비판은 삼가야만 한다.

세월호 침몰 1년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한 달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전 3월 27일의 모습. 이것이 멀쩡한 세월호의 마지막 모습이다.[12]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 측 인사인 '해경 123정' 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의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대법원에 최종적으로 유죄(징역 3년)로 결론났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인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에서 간단하게 대피 방송만 했어도 인명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거란 법원의 판단이며, '부실한 구조 행위'로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후에 야기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과 박근혜 정부의 비참한 몰락도 결국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었지만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세월호 참사였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무한 책임을 정부와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세월호 참사 직후 석연찮은 7시간 30분의 행보와 미용시술 논란, 그리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가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탄압 등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지지세를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였다. 결국엔 정부를 파멸로 이끌 만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서(세월호 7시간 및 생명권 침해) 탄핵안에 포함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판결하면서 이를 직접적인 탄핵 사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심각한 재난 상황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구조 활동 등에 참여할 의무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으며, 직무의 성실성 같은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탄핵 사유로 직접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판시된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탄핵 사유로 인정되었다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은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면 직접 구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탄핵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버리는 셈이므로, 정치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다른 판례들을 종합해봤을 때 직무불성실로 탄핵감이 되려면 말 그대로 그 어느 액션도 안 하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에 준하는 상태로 있었을 거라는 의심이 되지만, 탄핵 판결 당시에는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한 명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중대본으로 출석하거나 어떠한 지시를 내린 흔적이 확인되는 상황에서는 직무불성실 등을 문제삼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 의견으로서 당시 박근혜의 태도를 지적했다.

2023년 4월 16일로 참사 9주년, 희생자 9주기를 맞는다. 또한 2022년 7월 3일부로 참사 3000일을 맞았다.

3. 사고 원인[편집]

사고 원인에 대하여 검찰은 2014년 10월 6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 첫째, 12년 일본에서 수입된 후 수리 증축에 따라 총톤수가 증가(239톤) 하고 좌우가 불균형하게 되었다.
  • 둘째, 사고 당일 최대 화물 적재량(1,077톤)의 2배에 달하는 과적(2,142톤)이 있었다.
  • 셋째, 선체 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등을 1,375.8톤 감축 적재하였다.
  • 넷째, 관계 법규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 차량 컨테이너를 부실 고박하였다.
  • 다섯째, 사고 해역 통과 시 조타할 의무가 있는 선장이 선실을 이탈하고 근무 항해사와 조타수가 과도하게 변침하는 등 운항상 과실이 더하여 침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했던 검찰의 발표는 다음과 같이 기각되었다.
  • 첫째, 세월호의 증개축은 한국선급에 의해 허가를 받고 진행된 사항이며, 이로 인해 증개축의 위법성은 재판을 통해 인정되지 않았다.
  • 둘째, 과적은 만재흘수선이 기준이므로 법적으로 과적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검경 합수부 자문단 보고서에도 운항상 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셋째, 평형수는 원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운항 상황에 따라 조절 가능한 것이다.
  • 넷째, 선원 재판 1심에서는 이준석 선장이 조타실에 재선하여 직접 지휘를 할 의무가 없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범죄사실에서 제외되었다.

4. 사고 상황[편집]

세월호 72시간의 기록.

사고 과정과 구조, 수습 과정, 오보 및 이후 정정 과정 등의 타임라인이 잘 나와 있다. 여기서 사고 초기 대통령 지시는 후에 박근혜 정부 측 조작으로 밝혀진다.

우측 하단에 세월호가 시간에 따라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

4.1. 구조 현황[편집]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발생시각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추정)[13]
유형
발생위치
운항 중 침몰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동거차도 맹골 수도|인근 해상
탑승인원
구조
일반인: 151명
단원고교생: 325명
일반인: 97명
단원고교생: 75명
사망
미수습
일반인: 51명
단원고교생: 248명
일반인: 3명
단원고교생: 2명
기종
여객선|연안 여객선
총합
탑승: 476명
사망: 299명
미수습: 5명
구조: 172명
출처

(2017년 6월 5일 17:42 기준, 단위: 명)
  •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현황에는 단원고의 교사를 제외한다.
  • 2014년 4월 22일 이후로 사망자 중에서 탑승 명단에 없는 사람들도 발견되었으나, 공식적인 탑승객 명부의 인원수는 476명에서 변경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사실상 총인원수는 476+α인 상황.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승선원 명부의 정확성 문제, 차량탑승 미신고자 등 여러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탑승객 숫자는 언제나 변동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
  • 단원고 사망자의 수는 2017년 6월 2일자 기준으로 갱신되었다. # 학생 피해 집계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 실제 파악 인원과 차이가 날 수 있다.
  • '단원고'는 단원고 학생뿐만 아닌 선생님들도 포함된다.
  • '일반인'은 일반 승객뿐만 아닌 세월호 승무원도 포함된다.
  • '사망'은 시신이 발견된 경우, '미수습'은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경우이다.
  • 11월 21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당일 25대의 헬기의 수색/구조 현황을 시각화로 정리했다. 시각화 사이트는 링크 참고. #

4.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편집]

연합뉴스 측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지와 같이 선실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도면상으로 확인되는 선실 절반의 출입구 방향이 선체가 기울어진 쪽 반대 방향이다.

선체가 90도 이상 기울면서 출입구 쪽 벽면이 천장으로 바뀌었고, 아래 후술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피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배의 창문을 깨는 등으로 출구를 확보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구조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승객들이 창문을 깨기 위해서 의자로 유리창을 내려쳤지만 결국 깨지 못했듯, 여객선의 창문을 일반인이 주위의 물건으로 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탈출 선원들 "구조순서 밀릴라"...승객대피 안 시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휴가 중이었던 선장은 선박의 복원력이 저하됐다고 사측에 의견을 제시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는 전했다.

5. 관련 수사[편집]

참사 발생 이후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사고 원인 수사 등이 진행됐으며, 수사본부는 2014년 10월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5년 11월 세월호 조타수의 상고심에서 '조타기의 결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며 이 결론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잠수함 충돌설, 고의 침몰설 등 여러 가지 가설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 밖에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 300여 명을 내버려 두고 배에서 탈출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은 2014년 5월 재판에 넘겨졌으며 2015년 11월 대법원은 이 선장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선원 14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12년을 선고했다. 아울러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으나 퇴선 유도를 하지 않은 김경일 해경 123정 정장은 2015년 11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6.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점[편집]

6.1.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편집]

세월호 출항 예정시각이었던 2014년 4월 15일 저녁 6시 30분 인천항엔 안개가 자욱해 많은 선박들이 출항을 포기했으나, 세월호만 2시간 30분 늦게 출항했다. 또 세월호는 안전점검표에 차량 150대·화물 657톤을 실었다고 기재했지만, 실제로 실린 화물은 차량 180대·화물 1,157톤으로 무리한 화물을 적재했다. 이와 같은 과적 화물은 세월호가 급격한 변침으로 복원력을 잃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했다.

6.2. 진도 VTS 관제 허술, 초기 대응시간 허비[편집]

세월호는 급선회로 배에 이상이 생긴 이후, 사고 수역 관할인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 VTS에 최초 신고를 해 초기 대응시간을 허비했다. 더욱이 세월호가 진도 VTS 관할 수역에 4월 16일 오전 7시 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진도 VTS는 세월호의 관할 해역 진입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고를 받고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 해경은 여객선 안에 300명 이상의 승객이 남아있음에도 배 밖으로 탈출했거나 눈에 보이는 선체에 있는 승객들만 구조했을 뿐 세월호 내부로는 진입하지 않는 소극적 구조로 일관했다.

6.3. 선장 및 대다수 선원들의 무책임함[편집]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서는 인명구조 등 비상상황이 발생 시 선장은 선내에서 총지휘를 맡아야 하고, 승무원은 각자 역할을 맡아 탑승객 구조를 도와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선장을 비롯한 선원 대부분은 침몰 직전까지 탑승객에게 객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자신들은 배 밖으로 나와 해경 경비정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됐다. 특히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조류가 빠르다는 위험천만한 맹골수도(孟骨水道)였지만, 이 지역의 운항을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째인 3등 항해사로 드러났으며, 더욱이 이곳을 통과할 때 선장은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드러났다.

6.4. 허둥댄 정부, 초동 대처 실패[편집]

해양수산부는 사고 발생 후 즉시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세우고 범 부처 총괄업무를 시작했으나, 곧 관련 업무를 안전행정부의 중앙재난대책본부(중대본)에 넘겼다. 하지만 중대본은 사고 현장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수차례에 걸쳐 잘못된 정보를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여기에 경기도교육청도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잘못된 공지로 공분을 일으켰다.
여기에 해수부·교육부·해양경찰청 등이 별도의 사고대책본부를 꾸리면서 사고 관련 대책본부만 10여 개에 달했다. 총리실은 중구난방이 된 대책본부를 통합해 정홍원 전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를 수립해 관련 업무를 총괄하겠다고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철회했고, 결국 해수부장관이 다시 범부처 사고대책본부의 장을 맡게 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구조 작업은 더뎌졌다. 이처럼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직후 초동 대처부터 허둥댔던 정부의 무능과 혼선 등 허술한 재난대응시스템이 세월호 참사에서 여실히 노출되면서 정부 책임론에 대한 비난과 질타가 쏟아졌다.

6.5. 뒤늦은 구조 작업 돌입[편집]

세월호가 선수를 제외하고 사실상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정도였는데,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고가 난 지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 정도였다. 특히 사고 발생 첫날인 4월 16일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 그쳤다.
또 세월호는 사고 초기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떠있는 상태를 상당 시간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구조장비의 빠른 투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체 부양을 위한 리프트백 투입은 4월 18일에야 이뤄졌고, 야간구조작업을 위한 오징어잡이 어선은 침몰 나흘째,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은 침몰 5일째인 4월 20일에야 뒤늦게 투입됐다.

7. 반응 및 여파[편집]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사고가 일어난 직후 사고가 일어난 안산시와 진도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각계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번 사고와 관련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7.1. 대한민국[편집]

7.1.1. 중앙정부[편집]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6일 13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긴급 방문하여 10여 분간 침몰 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일몰까지 시간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오후1시 경 전남 진도군 진도읍 실내체육관에 방문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구조 미흡을 언급하며, 오열·호소하자 "마지막 한 분까지 구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등의 말을 남겼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6월 28일 오전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의 정부 공식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정 총리는 희생자 영정 앞에서 헌화와 분향, 묵념 등으로 조문한 뒤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났다. 정 총리는 이 자리에서 "실종자를 찾는데 최우선 전력을 기울일 것이고, 4월 16일(사고 발생일)을 영원히 기억하는 날이 되게 해서 국가 대개조와 변화를 이뤄내겠다"고 약속했다.

7.1.2. 단원고등학교[편집]

사고 초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과도한 취재 또한 논란이 되었고, 이는 4월 24일 단원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기자들에게 쓴 글이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논란과 반성 또한 급부상하였다.

사고 현장에서 구조된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생존학생들이 오는 6월 25일 학교에 복귀할 예정인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한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 생존학생들이 적은 '부탁의 글'이 올라와 누리꾼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단원고 2학년 학생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A4 1장짜리 글에는 생존학생들이 학교 복귀를 앞두고 가지는 두려움과 공포, 국민에게 부탁하는 각종 사항이 담겨 있다. 내용 중 '우리가 학교에 돌아갈 때 두려운 것들'이라는 항목을 통해 "사람들이 단원고 학생이라고 아는척하는 것이 너무 싫어요", "웃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해할까 봐 웃지를 못하겠어요", "단원고를 기자 출입금지구역으로 만들면 좋겠어요" 등 다양한 요청 사항을 담았다. 그러면서도 "'세월호 사고'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잊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근 두달 동안 학교 밖 연수원에서 따로 심리치료 등 교육을 받아 온 생존학생 72명(75명 중 1명 병원 치료, 2명 학교 복귀)은 며칠 남지 않은 학교 복귀를 앞두고 이 같은 '부탁의 글'을 지난주 다 같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7.1.3. 대한민국 국민들[편집]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고발생 후 아래와 같은 일들을 하였다.
  • 목포시는 승무원 박지영(22·여)의 빈소를 마련해 주고, 생존자들에게 구조금 10만원씩을 전달했다.
  • 개인택시 안산시 조합 소속 2000여 명 가운데 800여 명은 사고 다음날인 17일부터 안산, 시흥, 수원 등 장례식장 16곳이나 분향소를 가는 유족과 학생을 무료로 태우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안산에서는 하루에 20대씩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행하며 추가로 10대가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목포 등에서 24시간 대기하다가 안산시 상황실에서 연락이 오면 유족을 태워 안산까지 실어날랐다.
  • 진도 실내체육관에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와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식사와 물을 준비했다.
  • 의료단체도 진도로 몰려들었다. 의료진들은 체육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실신하거나 진료가 필요한 가족들의 상태를 살피고 즉각 링거 수액 등 의료 조치를 취하고 있다. 특히 가족들의 경우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서울대병원 등은 체육관 뒷편에 심리상담실을 비롯한 현장응급의료소를 마련했다.
  • 7월 23일 오후에는 팽목항 등대 앞에 '하늘나라 우체통'이 설치되었다. 진도의 종교단체가 만든 것인데, 유가족이 슬픔과 아픔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전문 상담사가 위로의 답장을 다시 보내 주고, 방문객이 슬픔에 동참하는 편지를 넣으면,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한다.

7.1.4. 방송사[편집]

KBS, MBC, SBS, JTBC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뉴스 특보와 특집 뉴스를 방영했다. KBS는 오전 10시부터 1TV에서 특집 뉴스와 특보를 내보냈고, 2TV에서는 수목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약 한 달간 중단되었다. MBC도 오후 6시 20분부터 'MBC 뉴스특보 진도 해상 여객선 침몰'과 '특집 MBC 뉴스데스크'를 방송했으며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들은 결방한다고 말했다. JTBC 역시 기존 정규방송을 중단한채 특보와 '특집 JTBC 뉴스 9'을 편성하였다. SBS 역시 기존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SBS 8 뉴스를 두 시간으로 편성해 특집 방송을 했다.

7.1.5. 영화계[편집]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각종 행사 취소가 이어졌다. '메이크 유어 무브', '역린', '인간중독', '표적', '리오2', '도희야' 등의 영화가 공식 행사 일정을 취소했다. 전국영화산업 노동조합 위원장 등 영화계 종사자들은 사고 발생 당일인 16일 "조명탄 하나 쏘아 올리는 데에 20~40분씩 걸리는 상황이라면 영화계에서 동원 가능한 영화 조명팀과 조명탑차, 발전차, 크레인, 루나조명기 등을 최대한 동원해 야간 수색작업에 불빛을 밝혀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17일 진도에 장비를 싣고 도착한 관계자들은 하릴없이 기다리다 되돌아왔다.

7.1.6. 학계[편집]

세월호 참사와 관련, 전국 대학교수들은 시국선언을 했다. 전남대 교수협의회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성명을 발표했다. 청주대 민교협은 정부는 잘못된 관행과 체계에서 비롯된 적폐를 도려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제도화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원대 교수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구대 교수들 45명은 참사의 슬픔을 보듬고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주지역 대학교수 모임인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교수네트워크는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관련 성명을 냈다.

7.2. 타 국가의 반응[편집]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여객선 침몰에 대한 애도 소식을 전했다. 일본 해상보안청 지원을 타진했지만,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은 제의를 거절했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xy는 24일 방송할 예정이었던 24화 "해저의 성! 수레기와 드레캄!!" 을 사정으로 인해 방송하지 않고, 25화 "소요우 짐전! 피카츄대 티고라스!!"를 24일에 방송하였다. 17일에 방송되었던 예고편에 따르면 24화는 수레기와 드래캄이 지키는 침몰한 여객선을 조사하는 스토리였다. 위성방송 WOWOW는 25일 방영할 예정이었던 영화 타이타닉을 다른 영화로 바꿔 상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역시 한국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사고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구조 작업을 돕겠다고 밝혔으며, 사고 해역에 강습상륙함 본험 리처드 함 및 해병을 파견했다. 그러나 본험 리처드 함에서 파견 된 구조 헬기는 한국 해군의 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구조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집회를 열었으며, 현지에서는 실종자 생환의 기적을 바라는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 또한 펼쳐지고 있다. 또, 교민들이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학생들을 기리고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광고를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민들은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싣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일부 완성된 광고 시안을 트위터를 통해 공개했다.

7.3. 세월호 노란 리본[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세월호/노란 리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여담[편집]

  •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처음 건조된 여객선이다. 일본에서 ‘페리 나미노우에(파도의 위)’라는 이름으로 2012년 10월까지 18년 동안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사이의 여러 낙도들을 운항했다. 이후 한국의 청해진해운이 이 배를 중고로 도입해 6개월 정도의 수리 기간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객실 증설 공사를 진행해 총톤수를 6825t으로 늘렸다.
  • 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이나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했다.

9. 문서 출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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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1] <여객선침몰> 세월호, 막판에 항로 급히 바뀌어(종합).[2]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위치는 세월호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장소이며, 침몰을 시작하기 시작한 지점은 조금 더 아래쪽이다. 자세한 것은 세월호 이동경로를 기록한 구글 지도 참조.[3] 본래 예정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지만 안개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면서 9시 정도에 출발하였다.[4] 도착 예정 시간을 1시간 조금 넘게 앞두고 사고가 발생했다.[5] 사고 전 정오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방송이 나왔다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다.[6] 희생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1997년생~빠른 98년생이다.[7] 미수습자를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사망자는 전체 304명, 이들 중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 사망.[8] 이들 모두 언론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단원고 학생은 남현철·박영인 군, 교사는 양승진 교사, 일반 승객이었던 권재근·혁규 부자 2명.[9]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미수습자이다. 물론 사망했다고 볼 수 있으나, 사망 선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시체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민법상 실종자로 분류된다. 민법 제27조 제2항에 의하여, 사고 발생 후 1년이 지난 때부터 유족 등이 사실상 사망에 준하는 실종 선고를 법원에 청구할 수는 있다.[10] 당시 [단원고등학교|단원고[11] 담화 내용으로는 해경 해체, 해산 및 각 부처 신설, 부패 청산, 법 개정안 등 강도 높은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역대 대통령 담화 중에서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사고 당시 온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가득차 있었음을 의미했다.[12] 심지어 마지막 링크의 블로그 글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1시간 40분 전에 업로드된 글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블로거는 침몰 3주 전에 탑승했던지라 무사했다.[13] 참고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에선 1분 빠른 8시 49분으로 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