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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r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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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진행 과정
3.1. 배경3.2. 사전 준비3.3. 결과
4. 준비 과정5. 3.1 운동 참여 인원 및 단체6. 독립선언서 낭독7.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8. 피해 규모9. 자제단10. 일본의 반응11.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3.1 운동 또는 3.1 만세 운동 또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 줄여서 기미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이외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적,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900여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신복룡 교수나 일본의 야마기 겐타로 약 50만 명 정도가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19년 3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천주교는 흥선대원군의 탄압후유증(7천여명 천주교인 살해)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3. 진행 과정[편집]

3.1. 배경[편집]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 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 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절묘하게 기회를 포착하였다.

3.2. 사전 준비[편집]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한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문하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만주 지린(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는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출국 전 김규식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3. 결과[편집]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2월 1일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4. 준비 과정[편집]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한편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으로 바뀐다.

5. 3.1 운동 참여 인원 및 단체[편집]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전국에서 고종의 장례를 위해 50만명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삼일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1 운동의 비폭력 항쟁 중에서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이는 1919년 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2.76%에 해당되는 인원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과 단체는 다음과 같다.

* 신한청년당 -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 유관순 -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 김규식 -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국내에서 사건이 발생해야 조선인의 운동을 홍보한다고 주장, 만세운동의 빌미를 제공
  • 김순애 - 신한청년당 비밀연락원,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국내에 전달
  • 여운형 - 신한청년당 당수, 신한청년단을 조직
  • 우드로 윌슨 - 미국 대통령
  • 김향화 -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 정칠성 - 경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 신익희 - 윤치영, 이광수 등과 2.8 독립선언을 주도
  • 신태윤 -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조직하고 만세 운동, 천안경찰서 헌병대에 투옥, 고문, 태형 처분
  • 윤치영, 이광수, 조병옥 -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관련
  • 박헌영, 임영신 - 당시 공주, 천안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교사
  • 허정숙
  • 상하이 임시정부 - 만세의 영향으로 파생된 망명 정부
  • 한성 임시정부

6. 독립선언서 낭독[편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7.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편집]

8. 피해 규모[편집]

운동의 참여 인원에 대하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은 차이가 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그런데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 회, 사망 7,509 명, 부상 15,961 명, 체포 46,948 명의 규모로 서술한다. 참여 인원에 대하여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전거로 삼은 사료에서 비롯한다. 역사학연구소나 한영우 등은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통계를 전거로 삼았다. 많은 한국의 교과용 도서에서도 대체로 이 통계를 활용한다.

그런데 3·1 운동을 진압하였던 조선총독부 쪽의 통계는 이와 크게 차이 난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소요사건일람표를 작성하여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의 상황을 10일 단위로 정리하였다. 이를 합산하면 4월말까지 조선인 시위 참여자는 58만 7,641명(50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 검거자 26,713명(당일 13,517명, 추가 검거 13,196명), 시위 참가자의 사망 553명, 부상 1,409명이라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일본군과 헌병, 경찰의 경우 사망 9명, 부상 156명으로 집계하였다. 한편, 조선헌병사령부가 발간한 소요사건 검거건수 조사표에서는 총 검거 건수를 26,713 명으로 집계하였다.

박은식의 통계는 3월에서 5월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고 조선총독부의 것은 4월 말까지를 정리한 것이어서 단순한 비교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렬하게 투쟁하고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받았음을 기억하려는 독립운동 진영과 그들의 통치에 저항한 사람이 적었으며 탄압 또한 질서유지를 위한 정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통치자측의 의도가 일정하게 반영된 수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쪽 통계를 보아도 3·1 운동은 일제 강점 이후 유래가 없는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다.

9. 자제단[편집]

자제단 또는 자제회는 1919년 4월 6일부터 12월까지 활동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시민단체 또는 자치적 단체로 3·1 만세 운동을 자제 내지는 진압, 시위 참여자를 설득, 귀가시키기 위해 만든 친일 조직이다. 중추원 참의 박중양, 교풍회 대구지부 회장 윤필오, 정석용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자위단으로도 불렸다.
대구와 경성에서 처음 조직되어 6월에는 충청남도 지역, 1919년 7월까지 충청북도, 전라북도, 황해남도, 울산, 수원 등 전국적으로 확대, 지부가 조직, 확산되었다.

자제단은 조선 각처의 3·1 만세 운동 가담자들에게 시위 자제 설득과 귀가를 호소하였고, 유언비어 자제, 폭력시위 만류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설득과 귀가 호소에 불응하는 인물, 단체는 지부와 본부에 보고하거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신고하였다. 1919년 4월 6일 대구와 서울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조선 각처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어 해당지역과 인근지역을 돌며 만세 운동 자제 내지는 귀가 설득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였다.

자제단의 임무는 주로 독립운동 참여자에 대한 체포나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친조선총독부 성향의 관료 외에도 개화, 개혁론을 주장하던 지식인, 민중 계몽론자 등이 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머슴이나 소작인들도 가입했다. 지주들이 머슴이나 소작인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지주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억제토록 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2월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만세 운동의 여파가 사라진 1919년 10월부터 서서히 자체해산에 들어갔다.

10. 일본의 반응[편집]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괴이의 상”이라고 표현하였다.

11.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