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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마이클 잭슨]] |
|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마이클 잭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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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
| r2 | 6 | [[마이클 잭슨]]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
| 7 | == 유년기 == | |
| 8 | 마이클 잭슨(마이클 조셉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 있는 가난한 흑인 집에서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마이클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가입했으며 가정부로 일했다. 마이클의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철강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개인적 취미로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가 해체했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 조지프 잭슨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2003년 조지프 잭슨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을 정기적으로 학대했음을 시인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유년 시절 고독을 느꼈다고 말했고 2003년에는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 나와 아버지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여 이에 대해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련이 자신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인정했지만 그러한 학대는 육체적 감정적 고통이 됐다고 하소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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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1963년 마이클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 밴드에 합류했다. 1965년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밴드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 잭슨 5는 스트립쇼와 클럽, 칵테일 라운지, 시 및 지역 강당과 고등학교 등에서 다양하게 공연을 했으며 1967년 8월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 아마추어로 콘서트 공연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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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지역 레코드사인 스틸타운에서 〈Big Boy〉 등을 포함한 몇몇 노래를 녹음하면서 전문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롤링 스톤은 어렸을 적 마이클을 "신동이다",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으며 잭슨 파이브에 대해선 "흑인 비틀즈"라고 썼다.[27] 처음으로 발매했던 네 장의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은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과 함께 모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 파이브는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로 미국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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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1972년 ~ 1975년 사이 잭슨은 "Got to Be There", "Ben", "Music&me", "Forever Michael" 네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Got to be there"는 앨범으로서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으며 "Ben"에서 발매한 싱글 〈Ben〉 은 빌보드 핫 100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마이클 잭슨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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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1973년부터 잭슨 파이브와 모타운은 갈등을 겪었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 사운드에 벗어나 다채로운 사운드를 제작하여 음악을 하기 바랐으며 작사/작곡의 자유가 부여되길 원했지만 모타운은 이를 거부했다. 또 잭슨 파이브의 인기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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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1975년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모타운을 떠났다. 이후 CBS 레코드의 자회사 에픽 레코드와 계약한 뒤. 밴드 이름을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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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1976년 더 잭슨스는 에픽 레코드에서의 첫 앨범인 "The Jacksons"를 발매한다. 미국에서 53만 장이 판매됐으며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36위에 머물렀다. 마이클 잭슨은 앨범에서 "Blues Away"라는 노래를 단독으로 작사/작곡했고, 티토 잭슨과 함께 "Style of Life"를 작사/작곡했다. 1978년 발매한 "Destiny" 앨범에서 마이클 잭슨은 작사/작곡과 프로듀싱의 측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해 나갔다. 그중에서 마이클이 형제 랜디 잭슨과 함께 작사/작곡/프로듀싱한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는 미국에서 싱글로 200만 장이 팔렸고 빌보드 차트에서 7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고 1979년 발매한 "Triumph" 앨범의 9개의 수록곡 중 6곡의 수록곡에 마이클 잭슨이 작사/작곡/프로듀싱의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그중 "This Place Hotel"는 마이클 잭슨의 중요한 곡으로 자리 잡게 됐다. "Triumph" 앨범은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0위를 했고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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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1978년 감독 시드니 루멧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영화에서 연주될 악보를 편집한 퀸시 존스와 만났고, 잭슨의 다음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같이 제작할 것을 약속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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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퀸시는 처음 마이클을 만났을 때는 지나치게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으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마이클의 재능을 보게 되었고 "잭슨은 아티스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는 데 익숙한 훈련교관인데 사실 마이클에게는 나 같은 역할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는 두 곡의 리드 보컬 부분과 세 곡의 백 보컬 부분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잭슨은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대부분의 가수들은 이용료가 비싼 스튜디오에서 모든 것 (작사/작곡 등)을 해결하려 했는데 그것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같은 프로듀서들이 잭슨을 원했던 이유이다. 그는 준비된 상태였으며 단 한 번의 세션에서 아주 많은 것을 마무리했다. 내게 충격을 줄 만큼 감동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 |
| r3 | 25 | == Off The Wall, 첫 성인 1집 == |
| 26 | 1979년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처음으로 함께한 앨범이자, 잭슨의 성인 커리어를 시작하는 앨범인《Off the Wall》을 발매했다. 빌보드 200에서는 3위를 기록했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을 판매했다.[35]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를 포함해 〈Off the Wall〉, 〈She’s Out of My Life〉 총 네 장의 싱글을 10위권에 진입시켰다.[36][37]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세련된 디스코로 구성됐다며 호평과 인정을 받았다. 2003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위에서 68위를 차지했다. 2008년 《Off the Wall》 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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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1980년 마이클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앨범, 가장 좋아하는 소울 알앤비 남자 아티스트,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싱글 부문에서 수상하며 총 3관왕에 올랐다. 또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앨범상을 받았고, 음악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그래미상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래미에서 상을 얻었지만 무척이나 실망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는데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을 고작 하나만 받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업계에서도 그래미의 잭슨에 대한 대우에 놀랐다고 한다. 마이클은 1980년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다. 이는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 마이클은 《Off the Wall》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앨범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 |
| 29 | == Thriller, 문워크, 백악관 수상, 그래미 신기록 == | |
| 30 | 1982년 마이클 잭슨은 정규앨범 《Thriller》를 발매한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이나 음악적 장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앨범은 66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기네스북에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등재됐다. 대한민국의 경우 《Thriller》의 구체적 판매량은 조사된 적 없지만 1984년 3월 21일 자 동아일보 신문을 보면 음반시장이 좁아 라이선스 음반은 5천장만 팔려도 잘 나간다고 보는 우리나라에서도 스릴러는 5만 장이 팔렸다고 보도됐다.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37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발매된 7개의 싱글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re', 'P.Y.T.(Pretty Young Thing)' 이 모두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올랐으며 마이클 작사/작곡한 'Billie Jean'이 7주 동안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한 뒤, 'Beat it'이 정상을 차지했다. 한 가수의 곡이 1주일도 못돼 연속으로 차트 정상에 오른 경우는 비틀즈 이후 19년 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다. 역시나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3위를 차지했다. 《Thriller》앨범은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립 음반 기록소에 등재됐다. 2008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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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Thriller》는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54] MTV는 1981년 8월 개국하였는데 MTV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밥 피트먼은 방송의 구성을 로큰롤에만 제한했고, 당시만 해도 로큰롤은 백인들의 음악으로 결국 대부분의 흑인 가수들이 배제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또 MTV는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 가수들의 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으며 MTV 개국 직후 뮤직비디오 750개 중 흑인 가수들의 노래는 40개가 채 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이러한 MTV에 대해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했다. 마이클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고 CBS는 Billie Jean 뮤직비디오를 MTV에게 제공하였는데 MTV는 거절했다. 그러자 CBS는 'Beat it'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다른 가수들의 모든 뮤직비디오를 빼버리겠으며 흑인 가수라는 이유로 방송을 불허한다는 MTV의 입장을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MTV에서 방영되는 가수들의 대다수는 CBS 소속이었고 CBS가 빼버리면 MTV의 앞날이 위험해진다. MTV는 결국 CBS의 뜻을 받아들여 마이클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이 사건 이후 흑인 가수들의 돌파구가 생겨났다. 바브 슬레이드 Kiss FM 뉴스 국장은 "그 이후 나온 흑인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MTV에 자연스럽게 비디오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의 후광 효과를 본 거죠."라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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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마이클의 영향력은 MTV에서만 통한 것이 아니다. MTV 말고도 많은 라디오들과 방송국들의 인종차별적 프로그램 정책을 돌파해냈다. 《Thriller》는 젊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록 비디오 방송국들과 흑인 청취자들에게 어필하는 어반 댄스 음악 방송국에서도 틀어졌는데 《Thriller》전에는 매우 소수의 뮤지션들만이 이 미묘한 인종 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케이블 텔레비전에도 일어났다. 흑인 가수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데서도 잭슨의 영상들은 방영되었다.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거의 안 튼다고 봐도 될 정도였던 Album Oriented Rock 계열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마이클의 노래와 영상은 방영됐다. 인종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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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미쳤다.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 등의 이유로 음반업계는 장기불황이었고 레코드 가게는 계속해서 망해갔다. 그러나 마이클의 음반만큼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Thriller》는 이러한 음반업계의 불황을 막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사람들이 마이클의 음반을 사기 위해 가게로 몰리고 다른 가수들의 음반까지 사간 것이다. 레코드 판매 최고 호황인 78년의 총 판매수입이 41억 달러였는데 마이클은 3천만 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78년 한 해의 모든 레코드의 판매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거뒀다. A&M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은 당시 "전체 음반산업은 잭슨의 성공으로 한몫을 봤다"라고 말했다.[62]《Thriller》 발매 당시 음반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마이클은 큰 고심을 겪었다. 마이클과 함께 앨범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200만 장만 팔려도 요즘 음반시장에선 잘 팔린 것이라고 하자 마이클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다 같이 열심히 만들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고 앨범을 발매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CBS 레코드 사장이 이 같은 소식을 듣고 마이클에게 전화로 위로를 하여 앨범 발매를 하기로 결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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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1983년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은 'Billie jean'을 댄스로 선보였다. 마이클의 트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문워크를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선보인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지난 50년간 미국인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순간 7위로 뽑혔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뮤직비디오인 Thriller (노래)는 11월 공개됐으며 14분짜리 대작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비디오이다. 마이클의 대중적 인기와 매력이 상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펩시콜라는 유명인과 관련된 업계의 계약 기록을 깨고 마이클과 50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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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1984년 1월 27일 마이클은 펩시콜라의 CF 광고를 촬영하는 도중 사고로 인하여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어 수술을 했다. 마이클은 화상사고 책임 주체인 펩시에게 150만 달러를 받아 합의를 했다. 마이클은 화상 치료센터에 합의금 150만 달러를 기부했다. 2월 28일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높으며 음악계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에서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휩쓸어 최다 부문 후보, 최다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잭슨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까지도 마이클의 유명세가 떨쳤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에서도 마이클 따라 하기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61] 이 해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자신의 자작 히트곡인 'Beat it'의 음을 빌려준 대가로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와 상을 받았다. 한편 'Thriller'를 내걸고 공식 솔로 투어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해 발매한 더 잭슨스의 'Victory'앨범의 제목을 빌려 그의 형제들과 'Victory Tour'를 개최했다. 그러나 형제들이 상당히 사행성적인 방법으로 티켓을 판매하자 마이클 잭슨에게 비판의 화살이 돌아갔고 마이클은 기자회견을 열어 티켓 판매 방식을 바꿀 것임과 약 3백-5백만 달러의 자신의 공연 수익 몫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마이클 잭슨은 더 이상 형제들과의 공연을 원하지 않았고 마지막 공연 당시 "이번 공연이 그의 형제들과 마지막입니다"라고 공연 끝 말미에 관중들에게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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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1985년 'We Are The World'라는 아프리카 기아들을 도와주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라이오넬 리치와 공동으로 작사/작곡하였으며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싱글로 발매돼 14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으며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해 8월 10일에는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카탈로그와 유명 가수들의 저작권을 포함하여 4000여 곡을 소유하고 있는 ATV 출판사에 대한 잭슨의 구매가 완료됐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초 폴 매카트니와 음악적으로 교류를 했는데 매카트니는 당시까지만 해도 저작권의 중요성이 크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마이클에게 음악 사업이 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이 말에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매니저 존 브랑카를 시켜 몇몇 유명 곡들의 카탈로그와 저작권을 구매했는데 1984년 ATV 출판사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부유한 호주의 투자자가 시장에 판매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매카트니는 요노 요코와 각각 1000만 달러를 내고 2000만 달러에 ATV를 구매하길 원했지만 요노 요코는 거절했고 마이클 잭슨은 여러 부동산 부유층들과의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의 ATV를 사들였다. | |
| r4 | 43 | == Bad, 언론들의 거짓 보도, King of Pop == |
| 44 | 1986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하여 고압 산소 체임버에 자고 있다며 산소 체임버에 누워 있는 마이클을 찍은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미국 주요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보도는 마이클의 자작극이었다. 화상 사고 이후 들린 화상 치료자 전문 센터에서 한 산소 체임버를 본 마이클은 동행한 의사에게 지금은 이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후에는 가능할 것이라며 여기서 자면 노화도 늦출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흥미를 느낀 마이클은 체임버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을 찍고 그동안 사이가 안 좋았던 언론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지와 자기 자신을 현실과 분리시켜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산소 체임버 안에서 자고 있다며 매니저 딜레오를 시켜 거짓 정보를 언론에게 흘렸다. 이후에도 마이클은 수차례 같은 행동을 하였는데 타블로이드 언론에선 마이클이 이상하다며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붙인다. 이는 '미친, 기괴한, 괴짜 잭슨'이라는 뜻으로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을 'Jackson'으로 칭하지 않고 'Jacko'로 칭하기 시작했다. 잭슨은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그러한 말을 쓰지 말고 'Jackson'이라 불러달라고 말했다. 또 그가 침팬지를 애완용 동물로 키우려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이상한 행위로 보였으며 점점 현실과 분리된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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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70년대 <마이클 잭슨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 가수랑 결혼을 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큰 이미지 타격을 입힌 적이 있다. 이뿐이 아니다, 마이클이 <Off the Wall>,<Thriller>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후에는 타블로이드 언론은 이전보다 더 근거 없는 기사로 마이클의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이에 마이클 잭슨 측은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언론들의 루머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허황된 내용의 기사들을 보도했다. 이로 인해 생긴 언론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마이클은 긴 기간 동안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은둔자적인 팝스타라고 묘사했다. | |
| 47 | ||
| 48 | 또한 이때 마이클의 피부색은 급격하기 바뀌기 시작한다. 이러한 피부색의 변화는 백반증이라는 질병에 의한 것이었으나 수많은 언론들은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아닌 내용들을 보도하여 마이클을 더욱 괴롭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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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1987년 마이클 잭슨은 정규 앨범 《Bad》를 발매했다.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5개의 싱글이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는 하나의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 곡이 나온 신기록이었다. 총 판매량은 3200만 장 이상으로 추정되며 역사상 10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전작 《Thriller》에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다수의 평론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 올 뮤직 가이드에서는 4.5점을 《큐 매거진》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롤링 스톤에서는 4점을 줬다. 뉴욕타임즈에서는 'favorable'로 평가받았다. USA투데이는 "Thriller 이후로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최고의 패키지", 워싱턴 포스트는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진 않을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VH1과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는 43위에 선정됐다.[83] 'Bad'는 발매 5개월 만에 1100만 장이 팔려 1987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앨범의 대성공과는 별개로 다음 해 열린 그래미에선 한 개의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Bad'로 인해 마이클은 단 2개의 음반으로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으며 80년대 가장 성공한 가수로서의 입지를 공고화했다. 전작들과는 달리 모든 노래의 프로듀서에 참여하였으며 11곡 중 9개의 곡을 혼자서 만들어 아티스트로의 면모도 확고히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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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마이클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가 일본을 처음으로 시작됐다. 총 123회 공연 440만 명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이뤘으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인 웸블리 구장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워 50만 4천 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85]공연 도중 관객들이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보고되어 안전상의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암표가 논란이 됐다. 6,500엔의 좌석을 구매하여 11만 엔에 다시 팔며 총 150만 엔을 번 암표상이 체포됐다. | |
| 53 | ||
| 54 | 1988년 첫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했다. 이 책은 4년 동안 모두 200만 권 넘게 팔렸고 뉴욕 타임즈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같은 해 3월, 캘리포니아주 'Santa Ynez'에 17억을 들여, 약 330만 5340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를 건립했다. 네버랜드에는 놀이동산과 동물원 영화관이 설치됐다. 얼마 후 그는 소련의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한 최초의 서방 연예인이 됐다. | |
| 55 | ||
| 56 | 1989년 마이클의 친한 친구이자 영화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소울 트레인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대중화되어 마이클의 별명이 'King Of Pop (팝의 황제)' 이 된다.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는 마이클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수여했다 | |
| 57 | ||
| 58 | 1990년 당시 슈퍼스타들의 평균 로열티는 12%였는데 마이클은 41%의 로열티를 지급받았다. Sammy Davis Jr.'s의 60번째 생일 축하를 기념하기 위한 공연에 참가하여 "You Were There"를 라이브로 불렀으며 'Man in the mirror'로 얻은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 |
| r2 | 59 | == 본 문서 정보 == |
| r3 | 60 | |
| r2 | 61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 62 | ||
| 63 |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D%B4%ED%81%B4_%EC%9E%AD%EC%8A%A8|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