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9
r10
1[[분류:세조(조선)]]
r9
2[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r10
3||<-3><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bf1400><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bf1400,#bf1400><colcolor=#ffd400,#ffd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4'''조선 제7대 국왕[br]{{{+1 세조 | 世祖}}}'''}}} ||
r9
5||<-3><nopad> [[사진|[[파일:세조(조선) 사진.jpg|width=100%]]]] ||
6||<-2><|2><width=22%> '''출생''' ||1417년 11월 11일 ||
7||한성부 충녕대군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
r13
8||<-2><|2> '''[[사망|{{{#f0ad73 사망}}}]]''' ||1468년 10월 2일 (향년 50세) ||
r11
9||한성부 경복궁 근정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r17
10||<-2> '''[[묘소|{{{#f0ad73 묘소}}}]]''' ||광릉 {{{-2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6-5)}}} ||
r9
11||<-2> '''본관''' ||전주 이씨 ||
r12
12||<-2><|8>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23대 영의정부사 ||
13||1453년 11월 20일 ~ 1455년 8월 3일 ||
14||<bgcolor=#f5f5f5,#2d2f34>조선 진평·함평·진양·수양대군 ||
15||1428년 7월 28일 ~ 1455년 8월 3일 ||
16||<bgcolor=#f5f5f5,#2d2f34>조선 제7대 국왕 ||
17||1455년 8월 3일 ~ 1468년 10월 1일 ||
18||<bgcolor=#f5f5f5,#2d2f34>조선 상왕 ||
19||1468년 10월 1일 ~ 10월 2일 ||
r9
20||<-2> '''[[국적|{{{#f0ad73 국적}}}]]''' ||[[파일:조선 국기.png|width=20px]] [[조선]] ||
r19
21||<|6><width=9%> '''이름''' ||<width=70><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휘''' ||이유 ||
r17
22|| '''자''' ||수지 ||
r11
23|| '''전호''' ||영창전 ||
24|| '''봉호''' ||진평대군[br]함평대군[br]진양대군[br]수양대군 ||
25|| '''시호'''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
26|| '''묘호''' ||세조 ||
r15
27||<-2> '''신체''' ||약 175cm ~ 180cm ||
28||<-2> '''가족''' ||아버지 [[세종(조선)|세종]], 어머니 소헌왕후[br]배정희왕후[br]자녀 4남 1녀[* 장남 - 의경세자, 장녀 - 의숙공주, 차녀 - 공주, 차남 - 덕원군, 3남 - 예종, 4남 - 창원군, 5남 - 이아지] ||
r14
29||<-2> '''[[종교|{{{#f0ad73 종교}}}]]''' ||유교, 불교 ||
r9
30[목차]
31[clearfix]
r16
32== 개요 ==
33세조는 [[조선]]의 [[조선 국왕|제7대 국왕]]이다.
34== 상세 ==
35[[세종(조선)|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인 [[문종(조선)|문종]] 사후에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조선)|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다.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아 [[영의정]]이 되었으며 조카를 압박한 후에야 단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구청한 것은 고려 말기부터 인데, 특히 세조는 대장경 구청에 잘 응해 주어 일본에서는 그를 '불심 천자'라고 불렀다.
r17
36
37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권신들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1455년에 조카 단종 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이 되었다.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을 잡아 추국한 후 죽이고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음에 고하지 않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다. 이에 분개한 생육신은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38
39탄신일이 태종 17년 9월 29일이라고 알려진 바 있으나 출처 없는 정보이다. 세조실록 참고시 매 9월 24일마다 탄일 하례가 적혀있다. 이에 따라 세조의 음력 생일은 9월 24일이다. 따라서 태종 17년(1417년) 9월 24일 생이다.
r18
40== 생애 ==
41== 사망 ==
42나병을 앓던 그는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졌다. 1467년(세조 13) 5월에 함경도 회령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 백성의 지역감정 등에 편승하여 거병, 단종 폐위 등은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거병했다. 그해 7월 조카 귀성군 준과 강순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8월 12일 진압한다. 이어 강순을 파견하여 함길도 너머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귀성군 준,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세조의 총애에, 어떤 이유로 반감을 품은 왕세자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모두 숙청했다.
43
44한편 훈구 공신들의 발호를 우려하던 그는 만년에 길재, 김숙자 등 정몽주의 문하생들과 김종직 등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종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된다.
45
46말년에는 조카 단종을 내쫓다 못해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22] 그는 자신의 병을 일반적인 역창이나 종기 정도로 여겼지만 그의 병은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나병이었다. 악몽과 불면증, 신경쇠약 등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바로 9월 10일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김계박 등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29일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세였다.
47
48능은 경기도 양주의 광릉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r19
49
50묘호는 세조이며 빈청에서 세조의 묘호로 신종, 예종, 성종을 추천했으나,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들어 세조를 제안하였고 이대로 정해졌다. 이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예종은 승천체도라는 시호를 뺀 사실을 신하들에게 추궁했고 공신인 좌의정 박원형은 뜻이 헛된거 같다고 했지만 예종은 듣지 않았다.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이고,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51
52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23]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r17
53== 본 문서 정보 ==
54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55
56 *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A1%B0_(%EC%A1%B0%EC%84%A0)|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