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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대한민국 국무총리]][[분류:대한민국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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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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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colbgcolor=#003478><colcolor=#FFC225,#ca993b><width=22%> '''출생''' ||1900년 10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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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한제국]] 한성부 용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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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사망''' ||1972년 5월 11일 (향년 71세) ||
11||[[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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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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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본관''' ||전주 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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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국적''' ||[[파일:대한제국 국기.png|width=20px]] [[대한제국]] ||
15|| '''학력''' ||경성 장훈보통학교 {{{-2 (졸업)}}}[br]경성고등보통학교 {{{-2 (졸업)}}}[br]중화민국 저장 성 항저우 체육학교 {{{-2 (졸업)}}}[br]중화민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2 (졸업)}}}[br]국방대학교 {{{-2 (행정학 / [[학사]])}}}[br]중화민국 타이완 중화학술원 {{{-2 (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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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가족''' ||아버지 이문하[br]어머니 연안 이씨[*생모], 김해 김씨[*계모][br]배우자 경주 김씨 마리야 김수란[*재혼][br]장남 이부흥[br]차남 이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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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병역''' ||[[한국광복군]] 중장[br]{{{-2 (1919년 1월 ~ 1946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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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
19|| '''소속 정당''' ||[include(틀: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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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bgcolor=#003478> {{{#FFC225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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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초대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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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948년 7월 31일 ~ 1950년 4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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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후임''' ||장면 ,,/ 제2대,, ||
r2
24|| '''대통령''' ||[[이승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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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목차]
26[clearfix]
27==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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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이범석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한민국 국무총리|국무총리]]이다.
29==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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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범석은 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조선 광복 직후 귀국을 시도했지만 강제로 상하이에 억류 조치 처분되었다가 이듬해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민족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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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 단독 정부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 7월 31일에서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국방부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탈당,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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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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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한민국 초기 시대 나치 연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 [[세종대왕]]의 5남이었던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호는 철기, 자는 인남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 인남, 철기, 이국근, 이국진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이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35== 평가 ==
36[[대한민국]] 건국의 주역, [[대한민국 국군]]의 이념과 징신을 바로세운 대한민국 국방건설의 아버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이라는 평가가 있다.
37
38족청 운영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점 때문에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독재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는 '미군은 투쟁했던 적이 독재주의라면 그 미군이 독재주의 성격을 띄고 있는 청년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간단한 논리의 귀결'이라며 반박하였다.
39
40나치 추종자 또는 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듣던 이범석은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도 평가받았다.[58] 한편, 파시스트라든가 권력 지향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이범석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이범석을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한 주장이다. 특히 이범석이 국방장관 재직시 군의 사상통일을 기하기 위해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부 제2국 정훈국과 정훈병과 창설,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 전담 제4국 창설을 국방장관의 파시스트적 독단이라고 당시 미군정고문단들과 일부 정치적 반대자들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우익, 좌익 등 잡다한 세력이 집합된 군의 인적구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적하기 위한 효율적 정책이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정훈병과는 공산주의자와 대치하고 있는 대만과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조직이다. 제4국은 후임 신성모 장관에 의해 해체되었다. 후일 625가 발발시 제4국이 있었다면 그렇게 기습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장관 직속 대북 첩보수집부대는 오늘날 국방정보본부와 국군정보사령부로 유지되고 있다.
41
42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비난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에 의하면 그가 민족을 많이 외쳤으니까 친일파 숙청을 열렬히 주장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와 정 반대였다며 이범석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 이라 비판하였다. 한편, 이범석이 일본군 출신들을 군내 입대를 허용한 것은 신생 국방 인력 부족을 고려한 실용적 측면이며, 결국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후 [[한국 전쟁]]에서 공산주의 적화를 막아낸 공로자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이범석의 민족주의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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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한편, 한강철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고, 한강교폭파의 문제는 시행과정에서 육군본부가 시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한강철교가 폭파됨으로 인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을 서울에서 지체하게 되었고 이는 차후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귀중한 시간을 갖게 하였다. 부산정치 파동시 내무장관 이범석은 부임한지 1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이어서 업무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실제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문봉제가 자신의 자서전 발간에서 부산정치 파동은 자신과 대한청년단 출신 김창민이 하였다고 밝혔다. 고 2008년 5월 9일 강영훈 前 국무총리가 철기 이범석 장군 추도식에서 밝힌 바가 있다.
45
46이범석에 대한 비판은 주로 좌익 측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정부 출범과 군 창설시부터 강력한 반공을 주장한 이범석을 견제하고 하야시키기 위한 음모로 인식되고 있다.
47== 본 문서 정보 ==
48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49
50 * [[https://ko.m.wikipedia.org/wiki/%EC%9D%B4%EB%B2%94%EC%84%9D|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