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4 vs 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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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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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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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노무현은 그가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229]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1년 8월 [[노태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찰력이 예리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총명함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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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 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APEC이나 ASEM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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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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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정권 때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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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는 공적자금지원을 통해 GDP 626조원, 재정수입 134조원의 증대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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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1998년 GDP는 △12.7%, 1999년에는 △22.0%, 2000년에는 △34.9%로 계속 급락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공적자금투입의 성과는 커, 정책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98년 1차 공적자금 64조 원의 투입으로, 2001년까지 금융위기에 따라 900조 원 가까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295조5천억 원에 그친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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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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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연예인 뿐만 아니라 해외 스타들도 만나 대중문화의 발전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서태지의 음악성을 비롯해 그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며 공개석상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당시 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그 예산을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문화산업의 각 분야는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특히 재임 당시 일본 영화 및 음악 등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해 한일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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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해와 용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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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대구·경북을 방문해 지역 원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242] 김대중은 당시 만찬에서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지 여부를 막론하고 그가 6·25 폐허 속에서 근대화를 이루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김대중이 무엇보다 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해 그야말로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설정했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의 발언에는 지역 화해 의지도 배어 있다. 대구ㆍ경북, 나아가 영남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를 끌어안음으로써 영ㆍ호남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43] 2009년 8월 14일 전두환은 입원 중인 김대중을 문병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우리 전직들이 제일 행복했어요. 5년 재임 기간 동안 청와대 10번 가까이 초대 받아가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라고 말해 그러면서 어떤 대통령은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고 덧붙이면서 회고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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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긍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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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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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김대중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김대중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 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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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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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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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에도 북한의 무력 도발로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자 햇볕정책이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1억 달러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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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총리실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각 군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는 참석하지 않고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것이 관례"라고 해명했다.[263] 김대중이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월드컵 공동개최국 국가원수로서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안보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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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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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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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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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 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268]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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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대중 정권때 타결된 신한일어업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을 수용하게 만든 여건은 김영삼 정권이 조성했고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포함되어서 영유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영삼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을 하며 감정 일변도의 외교를 벌인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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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이 발언에 대한 보복으로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을 근거로 새 어업협정을 주장하며 기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1997년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협상을 종용하던 일본은 '적선영해기선'을 임의로 설정해서 이를 침범한 한국 어선을 나포했고 결국 1997년 10월에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 지리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주변수역을 제외하고 협정을 체결하려는 의사를 표하고 김영삼 정부도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해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또한 독도가 한일중간수역에 들어갔으므로 신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그는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라고 새 어업협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바 있다.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선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협정과 독도밀약이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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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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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했고 연정상대였던 자유민주연합은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이 총재(1995.09~2001.11)였던 여당은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자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키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해외에서까지 화제로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에 자유민주연합의 강창희 의원이 꿔주기에 반발하여 출당 당하게 되자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자민련에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김대중은 의원 꿔주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김종필 등과 연합한 것을 계기로 1960년대부터 그를 지지하던 최기일은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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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홍업은 2003년 5월 기업체로부터 이권 청탁 명목으로 25억여 원을 받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여 원을 받은 후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김홍걸은 2001년 3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관련 로비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36억 9,000여 만원을 뇌물로 받고 2억 2,000여 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을 지낸 김홍업은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돼 1년 6개월간 복역 중,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석방됐다. 김홍걸은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의 대가로 기업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7년 8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집권기간 중 아들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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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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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IMF사태가 터졌던 1997년 12월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3.1%로 전년동월의 2.3%에 비해 무려 0.8%포인트나 높아져 있었고 4년6개월만의 최고치를 기록한 상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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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의 노숙자도 97년 12월 IMF사태 초기 5백여명으로 전년도 200명비 폭증한 상태였고, 전국노숙자숫자는 1200명 5월 추청노숙자는 5000명으로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IMF는 예상보다 가혹하게 구조 조정 요구를 해왔으며, 2%대의 저성장을 권고했고, 일부 부실 종금사와 은행을 파산시키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김대중당선자가 98년 초 신년사에서 민주적 시장경제 정착과, IMF의 협약이행, 사회경제적 안정등의 목표를 발표했다. IMF 요구에 의한 구조조정의 본격화로 실업률은 98년 5월에 7%로 폭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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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은 99년 2월, 10%에 달해 사상 최악의 수준까지 폭등했지만  이후 99년 10월엔 4.6%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를 반갑고 다행한 현상으로 여겼지만 자만하지 말고 고용구조개선에 관심을 가질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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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1997년 12월 외환유동성 위기 속에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와중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3년만인 2000년 12월4일 김대중 대통령이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2001년 8월23일에는 IMF 구제금융 자금 총 19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를 공식 '졸업'했다. 이는 사상 유례없는 조기 위기 극복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큰 업적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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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조정과 경기증진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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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하게 되면서 많은 기업들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그중 하나은행, 국민은행 등 대형 은행만이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해 부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 유수 은행들이 미국계 금융기관등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m 이러한 미국계 금융기관들은 다시 몇 배의 차익을 남기고 다른 외국계 은행에 되팔아 결과적으로 국내 금융시장에서 미국자본의 종속화를 만들었고, 일부 대형은행만 살아남고 지방 중소형 은행들(강원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에는 강제해체 명령을 내려 지방경제를 파탄시키고[294] 대형은행들만 살렸고 그 과정에서 외국 투기세력들의 배를 불려줘 "은행권 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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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의 경우 2000년 3월, 294포인트까지 폭등했던 코스닥 지수가 불과 9개월만에 무려 80%가까이 폭락하여 120조원을 허공에 날린 사태가 벌어졌다. 2000년 하반기 IT붕괴사태가 시작되자 주식시장과 코스닥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코스닥은 2001년에 50포인트선을 밑돌게 된다. 투자자들은 2000년 하반기의 IT붕괴사태와 "진승현 게이트"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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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증진 정책의 핵심이 되었던 신용카드 발급기준 완화 정책은 1999년 2월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 50% 제한을 폐지하고 5월엔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인 70만원을 전격적으로 폐지하면서 실시되었다. 2001년엔 카드사의 영업자유권 침해를 들어 길거리 회원모집을 허용하는 등 신용카드 발급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내수 경기 진작을 도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대거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고 카드사의 재정상황도 악화되어 LG카드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등 카드 대란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결국 2003년에 다시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을 5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시민들의 가정들이 파탄난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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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07
== 본 문서 정보 ==
100108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01109
102110
* [[https://ko.m.wikipedia.org/wiki/%EA%B9%80%EB%8C%80%EC%A4%91|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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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