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9 vs r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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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지, 항일 언론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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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 후에도 일제의 보호감시처분을 받았고, 그해 속리산, 지리산, 설악산 등의 바다와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 창간호에 열심히 노동하는 남녀 농부들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한 판화 '조조'를 발표했다. 이후 공제 지에 칼럼과 시를 싣기도 하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20년 2월 김일엽 등과 함께 신여자지를 창간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그해 7월 국내에서 간행된 폐허지의 동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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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접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그러나 폐허지는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1년만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폐간되었고, 그는 모교인 이화전문학교의 미술강사로 출강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칼럼 등을 기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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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접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그러나 폐허지는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1년 만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폐간되었고, 그는 모교인 이화전문학교의 미술강사로 출강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칼럼 등을 기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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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러 시와 소설을 쓰고 신문 만평을 그렸다.[28]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일본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조선인은 차별하는 것을 계모가 본처 자식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희화, 풍자하다가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다.[21] 봉건적·인습적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글들을 써서 사회적 비난과 냉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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