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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羅蕙錫 | Na Hyeseok
파일:나혜석 사진.jpg
출생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사망
1948년 12월 10일 (향년 5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89길 24[1])
국적
본관
나주 나씨 (羅州 羅氏)
학력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수료)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졸업)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전문학사)
가족
아버지 : 나기정
어머니 : 최시의
배우자 : 김우영 (이혼)
장녀 : 김나열
장남 : 김선
차남 : 김진
3남 : 김건
직업
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종교
불교
1. 개요2. 상세3. 생애
3.1. 문필, 학예 활동3.2. 여성 해방론 수용3.3. 독립운동 준비3.4. 3.1 만세 운동 참여3.5. 잡지, 항일 언론 활동3.6. 결혼과 화가 활동3.7. 전업 화가와 작가 생활3.8. 여성 운동과 남녀평등론3.9. 작품 활동과 사회 활동3.10. 여성 해방주의 운동3.11. 작품3.12. 투병 생활
4. 광복과 사망5. 사망 이후6. 추모 활동7. 작품평
7.1. 미술 작품7.2. 문학 작품
8. 수상9. 현대10. 나혜석 거리11. 여담12.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2. 상세[편집]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은 나아지, 나명순이며, 아호는 정월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지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와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재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3. 생애[편집]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나영완의 손녀이며, 시흥군군수를 지낸 나기정의 수성 최씨 최시의의 5남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나영완이 관직에 나가 출세했는데, 나영완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의 벼슬을 지내고 증조부 등에게는 증 호조참판 등 거듭 증직이 내려지는 등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 참판 댁, 혹은 나부잣집이라 불렸다.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의 개명인사로, 대한제국 당시 수원면장,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 군수를 역임하였고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5남매 중에는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그에게는 이복 언니 나계석, 여동생 나지석, 오빠 나홍석, 나경석이 있었다. 아버지 나기정의 서녀인 이복 언니 계석은 일찍 시집을 갔고, 큰오빠 나홍석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혜석은 둘째 오빠 경석과 동생 지석과 함께 자라났다. 그중 경석은 늘 혜석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깨인 인사였기에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고 나혜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 나혜석은 수원 화성,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침인 융건릉, 방화수류정, 서호를 찾아다니며 풍경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간 큰 오빠 나홍석은 1909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로부터 신교육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 나홍석의 집은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였다. 그는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 나기정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나혜석보다 연상인 이복 언니 나계석의 생모였고, 다른 첩은 나혜석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가 사춘기일 때 아버지 나기정은 첩을 들였는데 이는 나혜석보다 한살많은 여자였고, 어머니 최시의가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자란 나혜석은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된다.

나기정은 첫딸 계석을 제외하고 딸, 아들 가리지 않고 모두 신교육을 시켰다. 다만 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나혜석은 아기, 막내딸 나지석은 간난이라 불렀다. 아무리 개명 관료라도 봉건적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10년(융희 4년) 6월 수원 삼일여학교(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삼일여학교는 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02년(광무 5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내에 설립한 사립삼일여학당으로 1909년(융희 2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1910년 삼일여학교 재학 중 나혜석은 월간지 '개벽'을 위해 단색목판화를 제작하였다. 나혜석의 단색목판화 '개척자' 제작 소식은 월간 '개벽' 13호에 게재되었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후원했다.[6] 1910년 8월 삼일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9월 1일 경성부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했다. 2년 연하의 여동생 나지석 역시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자매는 처음에는 통학하다가 나중에는 경성부 근처에 기숙사를 얻어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진명여학교 재학 중, 1912년 3학년 때는 7명의 같은반 동급생 중 급장(반장)이었고 1등을 했다.

나혜석은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면서 '명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 이후 돌림자를 넣어 '혜석'으로 개명했다.[7]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혜석은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하이틴 스타가 되었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던 1913년 경성부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일본 유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여자 미술대학 전신인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油畫科)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오빠 나경석이 추천한 학교가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였다. 일본 유학의 배경에 대해서는 오빠 나경석의 권고 외에도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나혜석은 어렵게 일본 유학을 떠난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우수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1910년대 일본 유학생은 많이 증가했으나 그는 몇안되는 여자 유학생이었으므로 그의 일본 유학 생활은 화제가 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이후 교포여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결성해 기관지를 내는 등 문필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12]

작은오빠 덕으로 그는 비교적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다. 그는 하숙집 주인 딸과도 친하게 지내며 동경에 살고 있는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와 만나기도 한다.[6]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사토우 야타는‘머리가 덥수룩하고 키가 짤막한 청년’이라고 했다. 그 일본 청년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 기숙사까지 쫓아 다녔고, 그에게 죽자 살자고 피스톨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사토우 야타는 그에게 “당신더러 일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고백하였다. 그가 쓴 글이 <시라카바> 잡지에 ‘R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사토우의 청을 거절한다. 그 뒤 그는 오모리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학교는 성선으로 통학했다.

3.1. 문필, 학예 활동[편집]

1914년 학지광에 기고한 글 중 현모양처와 부덕을 비난한 글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하였다. 또한 1914년 '학지광'에 기고한 글 '이상적 부인'에서 '양부현부의 교육법'이 없는'양처현모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 된 교육주의'라며 비판하였다. 현모양처만이 좋은 여성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편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계몽적 단편 '이상적 부인'을 쓰면서 이 소설에 매혹된 이광수와의 염문이 동경유학생들의 뜨거운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1915년 4월 나혜석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전영택과 이광수를 고문으로 특별 초빙하기도 했다.

일본 체류 중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 의숙 학생 최승구를 만나 연애하게 된다. 오빠인 나경석은 최승구와의 연애를 반대했으나 오빠의 반대를 거부하고 최승구와 연애를 계속하였다. 다행히도 나경석은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최승구는 시인과 작가로서 표현력이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요절한다. 후일 엄상섭 등은 나혜석의 불행을 최승구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3.2. 여성 해방론 수용[편집]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자각,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똑같은 교육을 받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려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동료 남녀 유학생들에게 귀국하면 딸과 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나혜석과 김일엽은 일본 유학 때 세이토라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처음으로 눈뜨게 됐다. 특히 나혜석은 히라쓰카 라이초의 여자 해방론, 남녀 평등론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세이토 지를 구해서 읽어본 뒤 남녀평등론을 넘어 여성 해방론에도 관심갖게 된다.

나혜석이 평생 가장 사랑했던 문학 작품은 그가 1921년에 한국어로 번역·연재까지 한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그는 자유를 향해 남편과 자녀를 두고 간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의 운명을 자신이 닮아간다고 느꼈다. 나혜석이 처음 접한 인형의 집의 일본 번역 텍스트는 1912년에 나왔던 일본어 번역이었으며, 그의 ‘노라’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인형의 집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노라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다”라고 선언한 <세이토> 제3호이었다. 훗날 유학 초기 시절을 회고했을 때 나혜석이 “나에게 천재적인 이상을 심은 것은 세이토의 발행인 라이초 여사였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어 번역본으로는 충족되지 않던 나혜석은 틈틈이 노동과 잡화상점 종업원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인형의 집 영어본과 노르웨이 원전을 사서 내용을 독파한다.

그러나 후일 히라쓰카 라이초가“국가가 결혼을 통제하여 유전자가 나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에 서고, 1930년대에 “여성들은 국가와 민족에의 봉사를 통해서만 인권 신장을 도모할 수 있다.”라며 파시즘에 협조하게 되자 실망, 그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게 된다.

3.3. 독립운동 준비[편집]

1918년 경성과 함흥을 오가며 경성부의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미술 교사와 함흥의 영생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해 8월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진명여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곧이어 정신여학교와 영생중학교의 교사직도 사직한다. 이후 집에서 요양하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9월 '여자계' 3호에 단편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하였다. 한편 조선미술전람회에 매년 작품을 출품해 수상을 거듭했고, 1931년에는 일본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도 입상하는 등 실력을 인정 받았다.

다시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미술 교사와 함흥의 영생중학교 미술교사로 복직했지만 3.1운동 가담 혐의로 투옥되면서 그만두게 된다.

나혜석은 일본유학시절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1918년 말부터 같은 일본유학생 출신자들인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3.1 운동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그 자금조달을 위해 개성과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받은 나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 등 친구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기획한다. 1918년 겨울, '1919년 초에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자 나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비용과 잉크, 인쇄용지, 태극기 등을 마련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한다.

따로 비용을 모아둔 그는 1919년에는 경성부 운니동 37번지의 셋방으로 옮겨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다. 1919년초, 동경에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터와 연락이 되어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히 모였다.

3.4. 3.1 만세 운동 참여[편집]

1919년 1월 매일신보에 연말연시의 세시풍속 연작을 연재하였다.

1919년초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한 김규식이 국내에서 자신의 활동을 알릴만한 사건을 기획해야 된다는 연락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로 알리면서 지식인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준비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순애, 김마리아 등을 만나 김규식의 파리 파견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그는 여학생들에게 애국적인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글과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고, 개성과 평양에 가서 모금 운동을 하였다.

2월 8일 도쿄로 건너가 2·8 독립 선언에 참석하였다.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귀국, 1919년 3월 나혜석은 3·1 운동에 참여한다. 3·1운동이 터지자 그는 이화학당 기숙사로 박인덕을 찾아간다. 박인덕은 당시 이화학당 교사였다. 그 방에서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의논한다. 개성과 평양으로 다니며 지인을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한다. 3월 5일 아침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한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입수, 비밀리에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된다. 그는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의 배후로 지목, 3월 5일의 만세운동 참여, 사주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 뒤 3월 25일 다시 이화학당에서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면서 경성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그해 9월 풀려났다. 김마리아 등과 함께 3·1 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옥중의 열악한 환경과 빈민 범죄자들과도 대면하면서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그 뒤 노동자위로 태양이 떠오른다는 진보적 내용의 판화조조(早朝)제작 등의 사회 참여를 하였는데,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빈곤층 거주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한 오빠 나경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3.1 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문제가 상정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출옥후 파리회의에 조선 독립 문제가 상정되기는커녕, 조선인 대표단이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한다.

3.5. 잡지, 항일 언론 활동[편집]

가석방 후에도 일제의 보호감시처분을 받았고, 그해 속리산, 지리산, 설악산 등의 바다와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 창간호에 열심히 노동하는 남녀 농부들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한 판화 '조조'를 발표했다. 이후 공제 지에 칼럼과 시를 싣기도 하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20년 2월 김일엽 등과 함께 신여자지를 창간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그해 7월 국내에서 간행된 폐허지의 동인이 되었다.

그는 직접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 등과 교류했다.그러나 폐허지는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1년만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폐간되었고, 그는 모교인 이화전문학교의 미술강사로 출강하면서 다른 언론사에 칼럼 등을 기고하였다.

이후 여러 시와 소설을 쓰고 신문 만평을 그렸다.[28]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일본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조선인은 차별하는 것을 계모가 본처 자식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희화, 풍자하다가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다.[21] 봉건적·인습적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글들을 써서 사회적 비난과 냉대를 받기도 했다.

이 무렵 그의 집안에서는 그에게 결혼을 강요하였고, 3·1 운동 당시 김우영이 그의 변호를 맡아주면서 그와 가까워졌다. 그는 결혼을 오래 망설이다가 김우영에게 자신에게 과거에 남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래도 김우영이 이를 인정한다 하자 다시 조건을 제시하는데, 김우영이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결혼을 승락하게 된다.

3.6. 결혼과 화가 활동[편집]

1920년 봄, 정신여학교 미술교사직을 사직했다. 이때 동경 유학시절의 친구인 김일엽을 다시 만났다. 이때 나혜석은 목판화로 <김일엽의 하루>를 그렸다. 그는 문필가로 화가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계속 결혼 권고가 들어왔고 그는 마지못해 일본 유학 중 만난 엘리트 변호사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김우영은 그보다 10년 연상으로 전처 사이에서 이미 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라고 요구하였다. 그 뒤 그는 구체적으로 4개 조항을 예비 신랑이었던 김우영에게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는 대신 그는 결혼 청첩을 신문 광고로 싣기도 했는데, 1920년 4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때 그는 4가지의 조건을 제시했고 김우영이 이를 수용하면서 서울 정동 교회 예식장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김우영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요구한다.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조선을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4월 10일 김우영과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김우영의 주변에서는 이런 조건은 말이 안되는 조건이라며 결혼을 포기하라 하였으나 김우영은 주변의 권고를 듣지 않고 나혜석의 조건을 받아주었다. 그는 남편인 김우영에게 간략하고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릴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대의 명문가문임에도 결혼식은 단촐하였다. 신혼여행지는 전 남자친구인 최승구의 묘지였다. 신혼여행지를 부인의 전 남자친구의 묘지로 정한 것은 당대에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조건을 수용한 것과 전 남자친구의 존재 때문에 남편인 김우영은 시중으로부터 공처가, 애처가라는 비아냥과 함께 놀림감과 뒷담의 대상이 되었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나혜석의 첫사랑 최승구의 묘소가 있는 전라남도 고흥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영은 약속대로 아내의 첫사랑 묘소에 참배하고,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두 사람의 첨단 신혼여행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남편 김우영은 그가 일할 작업장과 화실을 마련해 주었다. 남편은 미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지만 정월의 ‘감성’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또한 김우영은 그의 조건들을 처음에는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과, 전처 소생 딸과는 따로 지내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전 남자친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겠다는 약속만 지켰다. 이후 숭의동의 김우영의 집에서 신혼을 보냈다.

남편 김우영은 1920년 12월 정신여학교 3·1운동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사를 맡는다. 이는 나혜석의 권유 때문이었다.

3.7. 전업 화가와 작가 생활[편집]

나혜석은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전업 화가였다. 미술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해 전시·판매 등을 통해 전업화가의 기초를 닦은 선구적 예술가이기도 했다. 많은 선배 남성 화가들이 시대를 한탄하며 붓을 꺾었을 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주제도 다양했고, 소재도 다양하였다. 수차례 개인전과 ‘조선미전’ 전람회 등을 통해 유화라는 새로운 표현 매체의 위상을 확립했고 작품을 판매하여 직업으로서의 화가 생활을 영위하였다.

동료 문인인 이광수외 염상섭 등의 소설, 저서에 삽화를 해주기도 했고, 신문에도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화 외에도 데생, 판화, 목각화, 석각화, 조각, 신문 삽화, 책의 삽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또한 작품에 정치색은 띄지 않으면서도 당시 사회상, 일상 풍경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인물화와 초상화를 그렸는데 정밀한 묘사에서 단순한 묘사 등 다양한 기법을 썼다. 또한 누드화도 종종 그리기도 했다.

근대여성문학사의 서막을 장식한 문학가이기도 했던 그는 가사노동에 열심인 여성을 다룬 신문 연재 그림, 일하는 여성을 등장시킨 '조선미전' 출품작 등을 통해 미술작품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인물화보다 풍경화를 선호했으며, 작품에서 풍경이나 정태적 인물상이 아닌 일하는 사람을 다루는 등 현실을 강조했다. 윤범모의 작품평에 의하면 작품의 특징을 꼽자면 견고한 구성과 자신감 넘치는 묘사, 확실한 공간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첫회부터 참가해 7, 8회를 제외하고 11회까지 18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조선미술전람회 도록`(1922~1932)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전업 화가이면서도 작가였고, 언론사와 잡지사에 칼럼도 기고하였으며 문단에 등단하여 단편, 장편 소설과 시작품도 남기기도 했다.

3.8. 여성 운동과 남녀평등론[편집]

1931년의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정원이 특선하고, 정원이 다시 일본의 제12회 제국미전에서 입선하는 등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그는 꾸준히 칼럼과 기고활동을 하였다. 1932년의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라는 글에서 사람과 돈과 세상의 세 가지가 무섭다고 하였다. 그의 딱한 처지를 접한 윤치호와 김성수, 송진우가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는 경성 시내에 거처와 화실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이혼 직후 집을 나와 하숙하고 있었는데 하숙집 주인 여자가 딸을 시집 보내려하나 신식 공부한 딸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는 갈등을 목격한다. 자신의 일처럼 여기던 그는 1937년 10월 이때 겪은 일을 소재로 삼아 소설'어머니와 딸'을 삼천리에 발표, 연재했다.

그는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여행기 '구미유기' 등을 통해 영국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였다. 국민이 정치와 정책에 참여하고 이를 결정하는데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참정권을 부르짖었지만 외면당했다.

문학, 그림 모두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던 그는 '이혼'이란 딱지 하나에 예전의 명성을 일시에 잃게 된다.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던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재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돌아온 건 냉소와 질시가 전부였다.[52] 그가 이혼녀라는 점과 외도를 했다는 점, 자유연애를 주장한다는 점을 들어 비난하였다. 그의 남편 김우영이 외도했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고 그의 외도만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매일신보에는 그의 작품을 가리켜 불미스러운 작품이라는 인신공격이 가해진다.

한편 이혼녀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그를 괴롭혔고 그는“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54]”라고 주장, 자기 아내와 누이, 딸은 순결하기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흑심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을 지적하여 파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며 남의 험담, 흠을 잡기 좋아하는 이상한 인간들이 많다며 항변하였다. 그러나 유림과 보수적인 노인층은 그를 사회의 타락과 탈선을 부추기는 요녀라며 어우동, 황진이, 유감동, 장희빈에 빗대서 그를 비난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서도 악의적인 언론 공세를 받았다. 총독부는 그를 비롯한 가정 밖의 신여성은 사회체를 오염시킬 염려가 있는 퇴폐와 몰락의 상징으로 매도했다.

또한 그는 모성애 역시 학습된 학습의 결과물이라며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다.”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혼에 대한 상처를 씻으려고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하던 나혜석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그림을 그려 제 12회 제전에서 입선하고 다시 귀국하여 선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과 해금강을 주유하며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3.9. 작품 활동과 사회 활동[편집]

1935년 초 경성부에서 소출품전을 가졌다. 1935년 '신생활에 들면서'를 삼천리 지에 발표, 구습과 인습에 얽매인 정조 개념의 해체를 다시 주장하였다. 자신이 정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정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부 유교와 기독교계 인사들은 그가 불순한 뜻을 품고 사회 분란을 조장한다며 비밀리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고, 총독부 경찰들의 내사를 당하기도 했다.

이혼과 냉대에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고향 수원으로 왔다. 집과 가까운 화령전과 서호, 화성을 찾아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당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가 `화령전 작약`(1935)이다.

1935년 10월 24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소품전'을 개최, 초상, 풍경등의 유화, 판화 등 200여점을 전시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 영국의 미술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하러 조선에 입국했고, 중국에서도 조선에 새로운 화가가 나타났다며 그의 작품을 보러 왔다. 같은 10월 장남 김선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열 두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러나 아들 선이 입원했던 병원도 찾을 수 없었고, 남편 김우영의 거부로 아들 김선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승진한 김우영은 다른 자녀들을 만나려는 그를 경찰을 시켜 막았다.[10] 이에 대한 분노와 심신의 고달픔이 겹친 그는 김우영이 믿던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혼 직후 한동안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생했지만 극적으로 질병을 딛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이혼 경력과 모성애,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등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으며 1940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림 공부 외에 학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전국에 순회 강연활동을 다니면서 여성 해방의 이유를 설파했는데, 남녀는 평등하는 점, 여성이 스스로 자립해야 되는 것, 여성 역시 남성 못지않게 중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설명하였다. 또한 고아원과 양로원을 다니면서 자원봉사를 하는 한편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기도 했다.

3.10. 여성 해방주의 운동[편집]

"정조는 취미다.", "자식은 악마다.","결혼은 지옥이다"라는 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 뒤로도 가정에서만 폭군으로 돌변하는 권위적인 남자상,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로 인식하는 남자들,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자립하지 못하는 여자들을 지적하며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들은 많은 파문과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라고 거침없이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 역시 사회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며 여성들 역시 취직을 하고 일터에 나올 것을 주장하였고, 여성들 역시 사회활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남성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한다'는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여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다. 남성들은 순결하지 못하면서 여성들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친일이나 부일협력으로 변절한 지식인들 역시 하지 않으니만 못한 활동을 했다며 거침없이 조롱하기도 했다.

사회적 파문이 일어난 이후에도 최린과 김우영의 사회적 위상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최린은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등으로 친일에 앞장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우영은 도청사무관, 중추원 참의 등으로 영전을 거듭했다.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만 더 깊게 찍힌 나혜석만 재기불능의 상태로 내몰렸다. 또한 여성의 사회활동 적극 참여 주장 역시 급진적이거나 가정의 행복, 평안을 깨려는 발상 정도로 치부되어 여러 비난과 비판의 눈총에 시달리게 된다. 일부 유교인사들은 서구에서 들어온 꼬리잘린 여우 전설을 언급하며 그를 꼬리잘린 여우에 비교하여 비난하기도 했다.

3.11. 작품[편집]

파리 체류 시절 그린 '스페인 국경' '파리 풍경' '별장' 등과 '농촌 풍경' 등 인상파 분위기의 풍경화가 주조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만주 봉천 풍경’ 등 초기에는 사실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보이다가 ‘파리 풍경’ 등 결혼생활 중기에 이르러서는 거침없는 필치와 색채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였다. 1948년까지 그는 다양한 미술품을 남겼다. 서양화가이면서도 동양화, 조각품, '이른 아침' 등의 판화, 그밖에 목각, 석각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이 있다. 그림 역시 인물화, 정물화, 초상화, 누드화, 삽화, 풍경화, 자화상에 이르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며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어법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의 조선미술전람회의 출품작은 대개 인상파적 화풍에 대담한 터치와 생략기법으로 주제를 첨예화시켰다.'는 평도 있다. 1920년대, 1930년대 당시만 해도 춘화와 음란의 상징이라며 기피되던 누드화 역시 과감하게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그림 작품에서는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나혜석은 '페미니스트의 선구'라고 불리는 인물이지만, 그림에서는 이러한 기질을 별로 엿볼 수 없다는 평가가 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와 일본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았던 당대의 여느 화가들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계 일각에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당시 시대상황이 서구 미술이 막 도입된 시기라 화가들의 그림은 대체로 인상파풍으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02년 2월에 공개된 노동하는 여성을 리얼리즘 기법으로 담은 목판화는 그의 페미니스트론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림’과 ‘글’을 통해 확고한 자기 세계를 만들었던 예술가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폐허지와 신여성 등의 동인으로도 활동하였으며, 또한 소설가로도 작품을 남겼겨 소설 경희, 규원, 현숙, 정순, 희생한 손녀에게, 원한, 어머니와 딸 등이 있고, 시로는 냇물, 사, 노라를 놓아주게, 광 등을 지었으며 기행문으로는 해인사의 풍관 등을 남겼다. 문학분야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 1918년에 발표한 자전소설 「경희」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손꼽힌다.

여자와 남자, 노인과 젊은이와 어린 아기, 유화와 판화, 조각, 섬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부터 대강의 형태만을 그린 추상화에 가까운 작품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주제와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한편 미술계 일각에서는 나혜석의 작품 중 일부는 명성에 못 미친다는 지적도 있다. 서구 미술 도입초기의 유명세에 의해, 극적인 삶으로 인해 신비화되는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구사했고, 유럽 여행 기간 중에는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워서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3.12. 투병 생활[편집]

1940년대 초 딸 김나열은 개성의 한 여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그는 개성에 있던 김나열을 찾아보기도 했다. 1944년 스스로 인왕산의 사찰을 떠난 나혜석은 아이들이 있는 경성시내에 자주 나타나 딸 김나열이 머무는 곳에서 얼마간 의탁하다가 서울의 둘째 오빠 나경석의 집에 갔으나 쫓겨났다.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 하려 했으나 파킨슨병과 우울증은 악화되었고, 주변에서는 파킨슨병으로 장애를 겪는 그에게 폭언과 조롱을 퍼부었다. 그 뒤 주변에서는 그를 부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고, 한때 안양 양로원에 가 있다가, 1944년 10월 22일 오빠 나경석에 의해 '최고근'이라는 불교명으로 인왕산 근처 청운 양로원에 맡겨졌다. 당시 청운양로원의 원장은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고, 양로원으로 데리고 간 것은 그의 올케이자 나경석의 부인인 배숙경이었다. 심한 병으로 거동도 어려웠고 많이 늙은 것 때문에 올케 배숙경은 그를 환갑이 넘은 노파라고 주위 사람을 속였다.

파킨슨병과 관절염, 중풍 등은 악화되었고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지자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아이들이 보고 싶어 몰래 청운양로원을 빠져나오기도 했지만 김우영이 경찰까지 동원하여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만날 수가 없었다. 1945년 정신이상이 심하고 건강이 안좋다는 이유로 양로원에서 퇴소하고 1945년 해관 오긍선이 운영하는 경기도 시흥군의 안양 경성 기독보육원의 농장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경성보육원 농장을 탈출하여 서울에 갔지만 남편 김우영의 방해와 경찰 신고로 자녀들을 만나지 못했다.

4. 광복과 사망[편집]

사회사상가로, 시와 소설과 평론을 쓴 문인으로, 그리고 여권운동가로서도 폭넓은 삶을 살았다. 특히 「조선독립」에서부터 「선전, 비평」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필력으로 그의 문장은 일세를 풍미했다. '자화상', '스페인 풍경', '누드' 등의 회화, '경희', '정순' 등의 소설을 남긴 작가, 또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5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 나혜석은 불륜이란 한 단어에 막혀 완전히 평가절하됐다.

1945년 9월 광복 직후 그는 파킨슨병 병세의 악화와 주변의 외면으로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의 친구였던 박인덕은 곧 미국으로 떠났고, 윤치호, 송진우 등도 사망했다. 광복 이후 한때 오빠인 나경석의 서울 집에 방문했었는데 조카인 나영균은 당시 그가 망가진 외모를 하고 있었음에도 유창한 영어 통역실력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사회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경쇠약증세를 보였다. 또한 탕녀, 은둔자 등의 악평에 시달렸다. 1946년 행인에 의해 발견되어 서울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입원되었다. 그 뒤 병원에서 나와 1948년 공주의 마곡사에 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마곡사를 나와 그해 11월 스스로 용산에 있는 서울 시립 자제원으로 갔다. 만년에 그는 회고록의 집필에 매달렸으나 미완성의 유고로 남게 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죽기 직전 여러 질병으로 대화가 어려웠던 그는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고 만다. 대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중인 파리에서 그린 작품 '무희'와 '스페인해수욕장', '중국인 촌', 그밖에 '나부', '등을 돌린 나부', '해인사 홍류동', '선죽교' 등이 유명하였다.

5. 사망 이후[편집]

나혜석의 죽음은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을 찾아가라는 광고가 실린 후에야 알려졌다. 1949년 3월 14일의 관보에는 무연고자 시신 공고라 하여 본적도 주소도 알려지지 않은 여자의 죽음이 발표되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나혜석이었다. 시중에는 행방불명으로 알려졌고 실종처리되었으며, 아무도 그가 나혜석이었음은 알아보지 못했다. 한국 전쟁 직후 그저 6.25 동란 중에 실종되었거나 죽었으리라고 생각되고 잊혀졌다.

그 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하여 보존이나 공고 없이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가 태어난 집도 현재는 집터만 남아 있으며, 남아 있는 작품들도 십여 편에 불과하다. 사후에도 미풍양속을 해치고 개인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의해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탄압, 금기시되었다. 그의 묘소는 어디 있는지 실전되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묘소는 2000년대,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어느 야산에 있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나혜석이 생전에 만든 미술 작품은 800여점 이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 전쟁으로 유실되었고, 그를 부정적으로 보던 시각과 언급이 기피, 금기시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보존되지 못하였다. 그의 작품 중 10분의 1 정도가 보존되어 있다. 조카 나영균에 의하면 '신교동 집에는 나혜석의 원고가 50 cm 넘게 쌓여 있었고, 그림도 여러 점 있었다. 나부라는 제목의 누드는 어머니가 벽에 걸면 창피하다고 다락에 숨겨뒀다. 그러나 6·25 때 피난에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한다.

작가 염상섭, 박종화 등은 그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며 아쉬워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나혜석이 한 시대의 두드러진 존재였기 때문에 많이 다뤄졌지만 충분한 사료가 없어 자유주의 여성이었다는 점이나 최린과의 파격적인 스캔들 등만 부각됐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동지이자 친구인 일엽은 '진흙 속에 핀 꽃 나혜석을 말한다'라는 글을 남겨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6. 추모 활동[편집]

1998년 나혜석 기념사업회가 공식 발족되었다. 2000년 1월 16일부터 2월 7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나혜석 전시회가 열렸다. 2000년 3월 9일부터 3월 26일까지 부산 경성대 미술관에서 '나혜석의 생애와 그림전'이 개최되었다. 5월 11일부터 5월 28일까지는 대전 교차로아트갤러리에서 '나혜석의 생애와 그림전'이 개최되었다.

2004년 10월 28일 오후 7시 조계종 용주사 수원 포교당 극락대원전 앞에서 제1회 나혜석 추모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매년 10월 나혜석 추모음악제가 개최되고 있다.

2008년 10월 2일부터 11월 30일까지 그의 60주기를 추모하는 '언니가 돌아왔다'라는 추모제전이 열리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나혜석의 유작들 외에 미술가 윤석남의 과거 작품들 일부와, 경기도 지역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도 모였다. 윤석남, 안진우, 류준화, 박영숙, 송상희, 이순주, 장지아, 중국에서 활동하는 북한 국적의 손국연씨 등 국내외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 26명이 참여했다.

7. 작품평[편집]

7.1. 미술 작품[편집]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의 작품 중 '자화상'은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한 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25]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지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7.2. 문학 작품[편집]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에 쓴 소설 「경희」는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작품은 고백체 소설이었다. 이는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한 것이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단편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경희’는 1910년대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의 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외도를 고백했던 나혜석은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의 경험을 고백했던 김명순. 절절하게도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던 이들은 '탕녀'로 낙인찍히며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의사 고백을 했던 염상섭이나 김동인 등의 남성작가는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됐다.

8. 수상[편집]

  •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
  •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9. 현대[편집]

1990년대 이후 나혜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그의 진보적 여성관, 신여성으로서의 행적 등에 대한 다양한 의미부여가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2008년에는 고액권 화폐의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 외에 나혜석도 거론됐다. 하지만 삶이 불행하고 비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탈락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혜석의 저작들은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남성주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낳기도 했다. 대전대 권혁범 교수 등은 나혜석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읽고 페미니스트임을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사학자 수원대학교 교수 박환은 3.1만세운동 양상을 분석한 단행본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펴냄)를 통해 나혜석이 3.1운동에 적극 동참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1996년 4월 8일 나혜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기도 수원에서 대한민국 '전국 여성 미술제'가 개최되고, 1997년 10월부터 매년 나혜석 미술대전이 개최되었으며, 1999년 10월에는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에서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2008년 4월부터 수원에서는 나혜석 문화예술제가 개최되었다. 1999년 11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로부터 2000년 2월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나혜석을 문화인물로 선정하는 선정과정에서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이유로 문화인물이 될 수 없다는 일부 자문위원의 반대하였다. 나혜석이 문화인물로 부적합하다는 문화관광부 자문위원들의 발언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여성운동가들과 여성단체의 집단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12년 5월 경기도 수원시에 나혜석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었다.

10. 나혜석 거리[편집]

나혜석 거리는 수원 태생인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 여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가량의 문화 거리로 문화예술회관, 효원공원, 야외 음악당 등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내 분수대,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 조경수가 잘 조성되어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서 거리 공연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 주변의 전문식당가로 먹거리가 산재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거리다.

나혜석 거리는 경기 수원시 팔달구 권광로188번길 25-2에 있다.
나혜석 거리 사진
파일:나혜석 거리 사진.jpg

11. 여담[편집]

  • 그는 작품과 기타 서명에 자신의 사인인 영문명 'Rha'로 서명하였다.
  • 소설가 염상섭이 1924년에 펴낸 단편집 '견우화' 표지엔 소담한 나팔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혜석이 그린 것이다.
  • 그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 역시 결혼할 때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댁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
  • 둘째 아들 김진은 미국 일리노이 주립 대학, 웨스턴 스테이트 대학 법대 교수로 퇴직하였다.
  • 실력있는 여자였으나 개인적, 환경적, 사회적인 편견과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 여성의 재능을 가리켜 '나혜석 콤플렉스'라고도 부른다.활기차고 재능 많았던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고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12.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현 서울용산경찰서 소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