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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申師任堂
파일:신사임당.jpg
신사임당 추정 초상화
본명
불명
당호
사임당(師任堂), 인임당(姻姙堂), 임사재(姙師齊)
국적
본관
출생
1504년 12월 5일
조선 강원도 강릉시 죽헌리 북평촌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사망
1551년 6월 20일 (향년 47세)
조선 경기도 파주시 주내면 율곡촌
(現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율곡촌)
가족
부친 - 신명화(申命和, 1476 ~ 1522)
모친 - 용인 이씨 이사온의 딸
배우자 - 이원수(1501 ~ 1561)[1]
아들 - 이선, 이번, 율곡 이이(1536 ~ 1584), 이우(1542 ~ 1609)[2]
직업
문인 · 유학자 · 화가 · 작가 · 시인
종교
유교(성리학)
1. 개요2. 상세3. 생애4. 사망5. 대한민국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6. 기타7. 평가
7.1. 긍정적7.2. 부정적
8. 본 문서 정보

1. 개요[편집]

사임당 신씨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2. 상세[편집]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며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된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되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된다.

3. 생애[편집]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먼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다.

친정어머니 이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다.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의 원조를 받아 한성의 본가에서 과거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 해에 몇 번 처가를 들르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이 대립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남편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계속했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시에 그쳤고, 기묘사화로 대과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산 사임당의 어머니는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고 소신있게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사임당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씨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사임당은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다.

신사임당은 여성이었으나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남편 이원수를 찾아온 사대부들을 탄복케 하였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아들 딸의 차별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 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 특히 신명화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후대의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결혼 이후에는 본이름 대신 사임당, 임사재, 인임당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한성부에 거주했고, 한성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7세 때는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으로부터 부덕과 소학, 대학, 가례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칭송을 받기도 했는데, 명종조에 살던 어숙권(魚叔權)은 어린 인선의 작품을 보고 감탄,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평하기도 했다. 엄격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 보통 사대부가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다.

한편 신명화는 덕수 이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하였다.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주변에서는 사위감을 볼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신 진사는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2]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다. 지체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다.

딸의 재능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택한 인물은 이원수라는 총각이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은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킨 조건은 이원수가 편모 슬하에서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딸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까운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처럼 시집을 보내지 않고 친정 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씨와 관계하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된다.

이원수가 첩살림을 시작하자 신사임당은 반발하면서 부부관계가 냉각되고 마침내 한때 그녀가 금강산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대의 동인과 남인들은 율곡 이이는 물론이고 사임당도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던 것은 아니냐며 이이와 그의 정당인 서인(西人)을 향한 정치공세 꺼리로 활용한다.

죽음을 예감한 신사임당은 자신이 죽더라도 새장가를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반발심 때문인지 이원수는 공자, 증자, 주자도 새장가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임당이 하나 하나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반박하자 이원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편 이원수는 한성과 파주 율곡리와 강릉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줄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인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여자가 바로 권씨였다. 그러나 권씨는 신사임당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 사는 탕녀였다. 첩인 주모 권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다시 이원수에게 첩인 권씨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원수나 사임당은 자녀들 중 특히 이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이이는 평생 화목한 가정에 대한 소망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딸 매창은 시·서·화에 능했는데, 신사임당은 딸의 재능을 알아채고 글과 그림을 직접 가르쳤다.

4. 사망[편집]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정성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이 형제의 병구완에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신사임당은 죽기 직전 남편인 이원수가 주막집 여성인 권씨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은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24]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그가 죽자마자 첩인 권씨를 본댁으로 들여오고, 아들 이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작품으로는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자리도(紫鯉圖), 노안도(蘆雁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적이며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사임당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551년 5월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중이던 남편 이원수는 세곡 운반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파견되어 갔다.

1551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이이(李珥)도 함께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 보냈다.[25] 전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울면서 편지를 썼는지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임무를 마치고 자식들과 함께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26] 그런데 사임당이 편지를 보낸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일 후에는 위독해졌다. 그리고 병상에 둘러 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신사임당은 5월 14일경 병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7일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향년 48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27]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이이가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사임당을 부덕(婦德)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이 의해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하였다.

경기도 파주군 율곡촌에 안장하였고, 후일 남편 이원수를 그녀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다. 후에 이이가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까지 승진하여, 정경부인(정1품)에 추증하였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또한 그녀의 친정 조카인 신립은 탄금대에서 전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선조이다.

5. 대한민국 50000원 지폐 도안 인물[편집]

파일:50000원 신사임당.jpg

'신사임당이 화폐 중심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물로 그 동안의 관례를 깨는 데 의미가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 인물이 신사임당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특히 여성계의 반대 의견은 강했다. 과연 신사임당이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의미 있는 인물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신사임당을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된 것에 대해서는 반발과 비판 여론이 존재하고 있다.

6. 기타[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는 친정아버지 신명화의 15대 방계 후손이 된다. 또한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사임당의 9촌 조카가 된다.

아버지 신명화의 6촌 동생은 신상으로 신상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의 할아버지이며, 인조반정의 공신인 신경진의 증조부이다.

2007년 11월 7일 사단법인 문화미래 이프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은행이 십만원 화폐에는 김구를, 오만원 화폐에 신사임당을 선정한 것은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성평등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문화미래 이프는 이 상태로 화폐인물이 결정된다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성차별' 사안으로 회부되어야 할 소지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이프는 또 초상 선정절차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단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화폐도안자문위원회 의장인 한국은행 이승일 부총재가 현재 화폐 초상 인물인 이순신, 율곡 이이와 같은 덕수 이씨 종친이며 율곡의 어머니로 덕수 이씨 집안의 족보에 기록되는 신사임당이 여성 화폐 인물로 선정된 것은 자문위원단의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이승일 부총재의 본관은 덕수 이씨가 아닌 신평 이씨라고 해명하는 한편 고액권 도안 소재가 된 인물은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 동화에서 사임당의 이름을 '인선'으로 작명한 이후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이라는 믿음이 존재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사임당의 본명이 적힌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7. 평가[편집]

7.1. 긍정적[편집]

신사임당은 봉건 시대의 제약을 받았으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자기 개발에 매진했다. 시문과 그림, 글씨 등 조선 시대의 대표적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개척하였다.

신사임당 생전에도 문정왕후나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나 한세기 전의 인물인 어우동, 유감동 등과 비교, 대조되어 훌륭한 여성,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았다. 사후에도 서인의 이론적, 정신적 지주인 이이를 기른 훌륭한 어머니로 존숭되었고, 17세기에는 송시열에 의해 격찬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는 어머니와 부녀의 모범으로 양반 사대부가의 여식들에게 훈육되었다. 조선 후기 율곡의 학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은 그녀의 시와 글, 서예작, 그림 등 찬사를 보내며 "그가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고 격찬하면서 그녀에 대한 국가적인 존경, 숭배는 강화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 이이를 추켜세우면서 율곡의 부모 역시 성자(聖者)로 현창하려 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이라는 미관말직인데다가 무능력한 인물이라 결국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성자로 추앙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1960년대 제3공화국 당시 한국의 위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추앙받았다. 그는 현재까지도 현모양처의 상징, 훌륭한 여성 작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7.2. 부정적[편집]

신사임당은 지와 덕을 겸비한 총명하고 인자한 어머니였지만 자식들의 곁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 '기존 남성중심 사회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신사임당이 여성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여성들은 지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역사로부터 외면당하고 평가절하되어 왔다. 교과서에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던 신사임당은 어떠한가. 신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예술가였지만 우리 역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의 신사임당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남편에게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면서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신 효녀효부로 알려져 있다" 위의 문장은 신사임당에 대한 자료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는 신사임당의 개인의 능력이나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누군가의 딸이면서 아내이면서 며느리이자 어머니였던 신사임당을 표현하고 있다.'고 사례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역사 속에서 여성은 이렇게 한정적인 역할만을 맡아 왔다.'는 것이다.

8.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1] 이원수(李元秀, 1501년~1561년)는 신사임당의 남편이자 율곡이이의 아버지이며, 조선의 문신이다. 신사임당은 살아 있을 때 이원수에게 공자, 증자, 주희의 고사를 들어가며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이원수는 이미 신사임당이 살아 있을 때 사임당보다 20살이나 어린 주막집 여자 권씨를 첩으로 삼았으며,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생전의 당부를 무시하고 서모(庶母) 자격으로 권씨를 집에 들였다.더욱이 권씨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장남인 이선과 나이가 비슷했다고 한다. 이원수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행보를 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아내 신사임당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순신과 친척 사이였다고 전해진다.[2] 이우(李瑀, 1542년 ~ 1609년)는 조선의 서화가이다.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 이이의 동생이며 조선 명종 때 진사시에 급제하여 비안현감과 괴산군수, 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을 지냈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글씨·그림·거문고에 능하여 ‘4절’이라 불리었다. 글씨로 양주에 〈윤은성사정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