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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 French Republic
파일:프랑스 국기.png
파일:프랑스 국장.png
국기
국장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기본 정보
국가
프랑스
수도
국기
언어
프랑스어
면적
5,490만 8,687㏊ (48위) [2032년기준]
인구
6,475만 6,584명 (23위) [2023년기준]
종교
기독교 65.1%
무종교 23.8%
이슬람교 8.7%
기타 2.4%
상징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
국화
붓꽃
국조
수탉
정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총리
엘리자베트 보른
입법부
프랑스 의회
집권여당
르네상스
외교
OECD
1948년 가입
NATO
1949년 가입
유럽연합
1958년 가입
G7
1973년 가입
통화
유로
국제 전화
+33
여행경보
전 지역 여행유의
1. 개요2. 상세3. 국명4. 역사5. 자연환경
5.1. 위치5.2. 지형5.3. 기후
6. 정치7. 국방8. 외교
8.1. 프랑스-대한민국 관계
9. 경제10. 사회
10.1. 민족10.2. 언어10.3. 교육10.4. 종교
11. 문화
11.1. 미술11.2. 건축11.3. 요리11.4. 스포츠
12. 시차13. 문서 출처

1. 개요[편집]

프랑스 공화국, 약칭 프랑스(프랑스어: France)는 서유럽의 본토와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비롯해 여러 대륙에 걸친 해외 지역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주요 도시들은 파리, 마르세유, 리옹, 툴루즈, 니스, 낭트, 몽펠리에, 비시 등이 있다.

2. 상세[편집]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고, 프랑스 제1제국을 건국하고 통치하였다. 다만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제국은 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분란 거듭하다가 1870년에 들어서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국제적 위상이 향상되는 효과를 누렸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의하여 본토가 점령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후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들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알제리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남 전쟁)이 있다. 1944년에 연합국 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을 세웠으나, 알제리 전쟁을 거치며 와해됐다. 현재의 프랑스는 샤를 드 골 대통령 등이 1958년에 세운 프랑스 제5공화국이다.

식민제국의 유산으로 인하여 현재 약 3억 명이 프랑스어로 소통 가능하며, 프랑코포니 등을 통해 프랑스어권 국가들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U 설립 시부터 EU federation 내에서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1966년에 탈퇴 이후 1992년에 재가입하였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이며 2018년 현재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에서 6번째, 유로국 중 3번째로 많다. 같은 해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토탈, 사노피, GDF 수에즈, BNP 파리바, LVMH, 로레알 등이 프랑스 회사였다.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 국가로서, 제조업이 대부분 쇠퇴하여 서 유로 5대 경제 대국 중 제조업 비중이 가장 낮다.

3. 국명[편집]

프랑스라는 이름은 프랑키아(라틴어: Francia)로부터 유래하였다. 글자 뜻대로 하면 프랑크의 땅을 의미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고대 게르만어에서 프랑크는 노예처럼 일하는 것에 반대되는 '자유로운'이란 뜻이다. 이 말은 여전히 프랑스에서 프랑(franc)이란 단어로 남아있으며, 2000년대에 유로가 사용되기 전까지 사용된 프랑스 통화로도 쓰였다.

프랑크족이 주로 사용하던 도끼인 프랑시스카를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옛 게르만어인 'frankon'에서 유래해서 프랑크족이란 이름이 붙었고 프랑스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프랑크족이 사용하였다 하여 프랑시스카라고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프랑시스카가 라틴어의 형태를 한 단어라는 점에서 프랑크인들이 자신들의 무기에 라틴어 이름을 지어줄 이유가 없으니, 로마인들이 그 무기를 사용하는 종족의 이름을 따서 무기에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프랑시스카에서 프랑크가 나왔다기보다는 프랑크에서 프랑시스카가 나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경우 프랑크인들은 이 무기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이 어원은 프랑스 안에서도 꽤 유명해서 비시 프랑스가 자국의 대통령기로 쓰기도 했다.

중화권과 베트남에서는 법국(法國)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발음은 파궈(중국어 보통화), 팝꿕(광동화), 팝(베트남어)으로 각기 다르다. 한국어권에서도 쓰였으나, 최근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불란서(佛蘭西)", "불랑서(佛朗西)", "불랑국(佛浪國)"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헌종실록의 프랑스측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1847년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은 자신을 "대불란서국(大佛蘭西國) 수사 총병관(水師總兵官) 납별이(拉別耳)" 라 소개하였다. 그밖의 문헌에는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 "불랑국(佛浪國)" 등으로 나와있다.

일본은 1858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불란서(佛蘭西)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대 일본에서는 후란스(フランス)라고 표기된다.

4. 역사[편집]

프랑스에는 본디 갈리아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기원전 5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로마 제국에 정복당했으며, 이후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급격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프랑크족들이 476년에 이주해,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번영하였다. 허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이후에는 내전이 일어났고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분리됐다. 이 나뉜 왕국들 중 서프랑크 왕국이 987년에 프랑스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프랑스 왕국은 필리프 2세의 지배 하에 중세 유럽 주요 강대국로 급부상하였으며, 르네상스 기간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더욱 발전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세력이 나뉘어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17세기 경에야 절대 왕정 치하에서 안정을 찾는다. 특히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 때에는 유럽에서 가장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18세기 후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며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5. 자연환경[편집]

5.1. 위치[편집]

프랑스의 국토는 북위 42도~ 북위 54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럽 대륙 서단의 지협부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632,734 km2이다. 전체적으로는 대각선이 1,000 km인 육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북해와 접해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는 동쪽의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북동쪽의 룩셈부르크, 벨기에, 남쪽의 스페인, 남서쪽의 안도라, 남동쪽의 모나코가 있다. 또한, 대륙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이 뛰어난 교통 상의 위치로 해서 유럽 문명의 십자로라는 말을 들어 왔고 항상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브라질과 수리남,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인 신트마르턴과 국경을 접한다.

5.2. 지형[편집]

EU 소속 국가 중 영토가 가장 넓다. 수도는 파리이다. 프랑스 본토는 남북으로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협과 북해까지 이르고, 동서로는 라인강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그 지형적 모양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종종 이곳을 L'Hexagone(육각형)이라고 부른다. 북동부의 알자스 지방과 남서부의 바스크 지방을 잇는 선을 경계로 남동부 지역은 높고 북서부 지역은 고도가 매우 낮은 평야나 대지, 또는 구릉지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로 대서양으로 지형이 열려있다. 한편 남동부 지역에는 고도가 높고 기복이 큰 산지들이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300 m 이상의 능선이 여러 곳에 분포하는 알프스산맥과 피레네산맥은 각각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자연적인 국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지형은 알프스 조산운동과 헬시니아 조산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전자는 알프스, 피레네, 쥐라 등의 험준한 습곡산지를 이루고, 후자는 중앙 산지와 북서쪽으로 뻗는 아르모리칸 산지 및 북동쪽으로 뻗는 보즈, 아르덴느 산지를 형성했다. 이들 산지는 침식이 진행된 노년기의 지형을 나타내고 일반적으로 완만하다. 중앙산지의 북쪽에는 파리 분지, 남서쪽에는 아키텐 분지가 펼쳐지고 남동쪽은 알프스와의 사이에 손강, 로온강의 좁은 계곡이 뻗친다. 아르모리칸 산지는 코탕탱반도(노르망디반도)와 브르타뉴반도에 걸쳐 200m 내외의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산지의 사이를 르와르강, 센강, 가론강 등이 흐르고 있다.

5.3. 기후[편집]

해안으로부터의 거리, 해발고도, 국지적 풍향에 따라 변화무쌍한 기후가 된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다양한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북부는 영국만큼이나 비가 자주 오나 남부는 비가 자주 오지 않는다. 우유, 버터, 치즈가 세계 최고의 품질, 세계 최다 가지수를 자랑하는 세계 제일의 낙농목축업국가이다. 피레네산맥일대와 알프스산맥일대는 겨울엔 매우 춥고 눈이 매우 자주 오며, 여름엔 건조하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진다. 프랑스의 겨울은 매우 추워 최북부 지역은 한겨울에 영하 40 °C 정도까지 기온이 내려간다. 기후의 연교차는 크지 않고, 서남부의 피레네산간지방과 동남부의 알프스산간지방의 일교차는 20 °C 정도가 된다. 강수량은 산악부에서는 1600mm 전후이고, 내륙에서는 1200mm 전후이다.

6. 정치[편집]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국방[편집]

프랑스 군대(Forces armées françaises)는 프랑스의 정규군으로, 프랑스의 대통령이 최고 통수권자이다. 크게 프랑스 육군(Armée de Terre), 프랑스 해군(Marine Nationale),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 프랑스 타격군(Force Nucléaire Stratégique), 프랑스 국가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로 편제가 나뉘어 있다. 이들 중 프랑스 타격군은 비대칭무기와 핵무기를 전담하고, 국가헌병대는 교외 지역에서 경찰의 업무를 맡아보기도 한다. 국가헌병대는 기본적으로 군에 속해있기에 프랑스 국방부의 명령을 받으나, 경찰의 성격도 분명하게 띠고 있기에 내무부의 통제를 받기도 한다. 현재 프랑스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군사 조직들 가운데에 하나이며, 특히 유럽 연합에서는 가장 거대한 군대이다.

국가헌병대의 일부인 기동 헌병대(Gendarmerie mobile)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하는 전투경찰처럼 국내에서의 각종 시위 등을 진압하기 위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시위 진압 전문부대로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서 이들로는 도저히 제압이 어려울 경우에는 국가 경찰 소속의 시위 진압부대와 같이 폭동을 진압하기도 하며 해당 부대 내에는 대테러부대인 GIGN과 시위 진압 전용 장갑차들로 구성되어 있는 GBGM이 배속되어 있다. 인원은 지역헌병 다음인 16,108명으로 많아 국가헌병대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하에 안전특수대, 헌병특경대, 헌병낙하산중대, 산악구조부대, 동굴구조대, 공화국수비대, 항공수송대, 대통령경호단 등을 두고 있다.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라고 하는 조직은 파리에 있는 대통령궁인 엘리제 궁과 국회의사당, 총리관저 등 주요 시설들 및 국립 은행에서 화폐 수송시의 경비와 검문검색 등을 담당하는 경비 전문 헌병 조직으로서 수비대 휘하에는 본부를 비롯하여 2개의 보병 연대와 기병 연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폴레옹 1세 시절의 근위대였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를 계승한 부대라고 하며, 따라서 공화국 친위대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헌병 항공대(Gendarmerie de l'Air)는 헌병들, 특히 대테러 부대 소속 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항공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단,규모가 750명 정도로 비교적 적다보니 주둔지도 두 곳뿐이다. 항공 수송 헌병대(Gendarmerie des Transports Aériens)는 민간 공항 및 공군 기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공항은 프랑스의 대표 공항들이며 지방 공항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자치경찰 등이 담당하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평시에는 프랑스 교통부 장관의 관리 하에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가 헌병대는 프랑스 전역과 식민지 등을 주 활동범위로 두고 있는 까닭에 2011년 기준으로 무려 9만 8155명이 프랑스 국가 헌병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프랑스군에서 육군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군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프랑스 외인부대라 하여 전세계 140여개국에서 지원한 외국인들을 받아 이들로만 자치적인 군대 조직을 운영하는데, 이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프랑스 시민권이 주어진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구성으로, 이와 비슷한 조직을 운영하는 나라로는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정도가 있다. 2002년 1월 1일부터 프랑스 정부는 모병제(지원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며,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과 함께 1960년대 이래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받아온 국가이다. 2018년 프랑스의 국방비는 63.8억 달러로, 프랑스 GDP의 2.3%에 달하며 세계에서 5번째로 국방비 지출이 많은 나라로 떠올랐다. 현재 프랑스는 362,48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06대, 군용기 1,757대, 군함 289척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공군은 미라주와 라팔 등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소 항공방위산업체는 뉴론(Neuron) UCAV(무인공격기)를 개발하였다. 프랑스는 그외에도 조기경보통제기, 정찰위성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략 원자력 잠수함과 탄도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등 무서운 핵전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이미 샤를 드골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핵강국이지만, 핵전력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탓에 여전히 핵전력은 강화시키고 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편제를 바꾸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는 등 이전 시절에 비해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군사력이다.

8. 외교[편집]

프랑스는 UN의 창립국이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영구 이사국들 중 하나이기도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G7, 세계무역기구, 태평양 공동체(SPC), 인도양 협의회(COI)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한 카리브 국가연합의 가맹국이기도 하며, 전세계 84개국에 달하는 프랑스어 사용 국가들의 모임인 프랑코포니의 종주국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전세계 3위로 많은 공관들을 두고 있으며, OECD, 유네스코, 인터폴, 국제도량형기구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전후 프랑스의 외교는 유럽연합과 유럽 국가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연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 이래 프랑스는 독일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을 이끄는 쌍두마차 격의 지위를 얻어내었으며, 60년대 내내 유럽 전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방법을 통하여 유럽의 종주국 지위를 차지하려 들기 시작하였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 간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거나 악화된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과 제2세계 국가들 등 공동의 적이 남아있었던 터에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하였다. 프랑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나, 드 골 대통령이 미국과 영국이 갈수록 밀착하는 모습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미국에게 프랑스 군을 포함한 나토 군대의 합동 지휘권을 넘겨주기를 거부하면서 프랑스군은 독립적인 지휘계통을 따로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2009년 4월 4일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NATO의 합동지휘체계에 재가입할 것을 천명하면서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 역시 다시 NATO의 지휘 하에 소속되었다.

1990년대 초에 프랑스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지하 핵실험을 시행한 것을 두고 국제적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던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영국과 관계가 한시적으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옛 아프리카 국가들과 여전히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상아만과 차드 등지에 여전히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군을 파병하고 있다. 최근에는 말리 북부 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말리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를 위시한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이 말리 군대를 도와 파병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중세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영국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관계에서는 보조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근대 독일의 성립이후 보불전쟁, 1, 2차 세계 대전 등에서 독일과 대립하였으나, 전후에는 유럽통합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 및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 냉전시기에 샤를 드골은 국제패권구도가 미국-소련의 양강구도로 편성되면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며, 이에 따라 서방국가이지만 소련과의 국교를 수립, 중화인민공화국의 UN대표권 승인(1964년 1월에 국교 수립)[13].등 중립적인 외교를 표방하였다.

옛 식민지국가들과도 프랑코포니를 통하여 일정부분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나, 알제리 독립전쟁을 통해 많은 유혈사상자를 낸 알제리와의 관계는 역사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현대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지부티는 프랑스로부터 1977년에 독립하였는데, 프랑스와 지부티 간의 군사적, 경제적 조약들을 통해, 지부티에게 안보와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문제에 있어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어느 정도 비판하고 있다. 아시아권 국가 중에서는 경제적으로 중국, 한국 및 일본과의 외교를 중시한다. 1799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략하였다. 그의 군사들은 룩소르와 카르낙에서 고대 이집트의 사원을 발견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로제타석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하게 된 중요한 단서였다. 미국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우방국이나,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프랑스가 비판하면서 외교관계는 잠시 소원해졌다가 부시가 물러난 후에 오바마 대통령 임기 기간동안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프랑스와 시종일관 우방국으로서 나폴레옹이 집권할 때 스페인의 식민지로 프랑스의 영향권이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 것에 반발을 일으켜 유럽 내에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는 시종일관 우방국으로서 첫 월드컵에도 프랑스가 참가한 것부터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프랑스는 아주 노골적으로 아르헨티나의 편을 들기까지 했으며 이에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에 엑조세를 공짜로 주기까지 했다.

8.1. 프랑스-대한민국 관계[편집]

조선 후기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포함된 천주교신자들을 조선왕실에서 탄압(병인박해)하면서 외교문제가 되었고 이를 빌미로 프랑스군대와 한국군이 격돌하는 사건 - 병인양요 - 이 일어났다. 이때 강탈당한 외규장각 도서 등 문화재의 반환문제는 현재도 미해결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의 경우 2010년 G20 정상회의 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사르코지 대통령은 반환문제를 합의를 했고, 2011년 4월과 5월 4차에 걸쳐서 5년마다 갱신되는 대여방식으로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조선 후기에 국교를 수립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는 인정하는 분위기여서 프랑스 조계 지역의 경찰들은 김구 주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유에서일 뿐,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전쟁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파병했다. 파리는 한국의 군정기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과 프랑스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축구 선수 권창훈 등이 프랑스 축구 클럽에서 뛰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교과목에 프랑스어가 개설되어 있고, 프랑스에서는 한국어를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2006년 11월 28일 NATO 정상회담이 북유럽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열렸다. 29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한민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를 나토에 편입하자고 제안하였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파비앙 코르비노와 로빈 데이아나는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많은 프랑스인들이 서래마을에 살고 있다. 2015년 9월 18일에는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에펠탑에서 레이저 쇼를 했다.

이예다는 군대 그 자체를 이유로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했다.

9. 경제[편집]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들의 모임인 G7에도 가입하여 있을 정도로 경제가 발달하였다. 2018년에는 PPP로 환산하였을 때 세계에서 10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 연합 내부에서는 독일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1999년에는 다른 11개국과 함께 유로화를 창설하였으며, 결국 2002년에는 프랑스 프랑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완전히 유로화 체제로 진입하였다.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혼합 경제 체제로, 개인 자본이 주를 이루며 국가의 자본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인프라 쪽에 많은 지분을 기고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국가 핵심 산업인 핵산업, 전기 산업, 철도 사업, 항공기 사업, 정보 통신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다만 1990년대 이래부터는 이 쪽에 대한 통제를 점차 늦추고 있으며, 프랑스 텔레콤이나 에어 프랑스와 같은 대기업들과 보험 산업, 군수 사업들의 국유 지분들을 점차 개인들에 매각하면서 민영화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 프랑스는 에어버스와 같이 유럽의 항공 산업을 선도하는 국가들 중 하나이며, 기아나 우주센터를 갖추고 있는 등 독자적인 항공우주 기술도 매우 상당하다.

2009년 세계무역기구는 프랑스를 세계에서 6번째로 거대한 수출국으로 조사하였으며, 제조품의 4대 수입국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2016년에는 월드 팩트북에서 프랑스를 세계에서 7번째로 규모가 큰 수출국으로 명시하기도 하였다. 2008년 프랑스는 OECD 국가들 가운데에서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양의 외국인 직접 투자를 받은 나라이기도 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와 미국 다음으로 높은 규모로, 영국과 일본, 독일 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같은 해에 프랑스 회사는 2,200억 달러를 국외에 투자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프랑스는 OECD에서 2번째로 국외에 투자를 많이 한 나라로 떠올랐다. 프랑스는 금융업과 은행업, 보험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파리 증권 거래소는 1724년에 루이 15세 의하여 처음 문을 열었으며, 2000년에는 암스테르담, 브뤼셀 등의 주식거래소들과 합동하여 유로넥스트를 설립하였다. 2007년에는 세계 최대 증권 거래소들 중 하나인 뉴욕 증권 거래소와 힘을 합쳐 NYSE 유로넥스트를 설립하였다. NYSE 유로넥스트의 프랑스 지부는 유럽에서 런던 증권 거래소의 뒤를 이어 2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유로존의 회원이며, 유럽 단일 시장의 일원으로 막대한 시장을 공략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긴밀한 경제 협약들을 맺었으며, 2002년에는 유로화를 가장 주도적으로 도입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의 기업들은 보험업과 은행업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유수의 기업 AXA와 은행 BNP 파리바, 크레디트 아그리콜 등이 가장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특히 BNP 파리바는 세계 1위의 은행이고, 크래디트 아그리콜이 6위로 그 뒤를 이었다. 2009년에는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이 세계에서 8번째로 거대한 은행으로 떠올랐다.

임금은 서 유로 주요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상승세가 가장 높았다.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 약 29,000유로(한화 약 3,872만원)에 달했다.

10. 사회[편집]

10.1. 민족[편집]

현재 프랑스인 대부분은 켈트족과 골족들로부터 유래하였으며, 그 외에도 로마 제국 시대에 유입된 라틴 계열과 프랑크 왕조 시대에 유입된 게르만 계열이 조금씩 섞여 있다. 중세 시기 동안에는 수많은 국가들과 먹고 먹히는 과정을 반복하고, 전쟁을 통하여 인구 유입과 유출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점차 민족 구성이 타 유럽 국가들과 섞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서쪽으로는 브르타뉴인들이, 남서쪽으로는 아키텐인들이, 북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동쪽으로는 알레만인들이, 남동쪽으로는 리구리아인들이 조금씩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50년대부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대규모의 이민이 일어났는데, 이후 평등을 추구하는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국민들을 민족이나 종족에 따라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법적인 차원에서 금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프랑스의 민족 구성은 대부분 개인 기업에서 행하는 것이다. 2004년 기준으로 프랑스 도시권에서는 약 85%가 백인종이었으며, 10%는 북아프리카인, 3.3%가 흑인, 그리고 1.7%가 황인종이었다고 전한다. 2008년 조사에 의하면 가장 많은 이민자 집단은 500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들이며, 그 뒤를 400만 명 정도의 북아프리카인, 250만 명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인들, 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20만 명의 터키인들이 뒤따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스 등 타 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도 있다고 전한다.

고대에 갈리아라고 불리던 이 지역에 살던 켈트족 계열의 골족과 그 후에 로마의 지배를 거치면서 라틴족, 주변의 민족인 게르만족(프랑크족, 부르군트족, 프리슬란트족, 앵글족, 색슨족)·노르만족(데인족, 노르게족)·켈트족(브리튼족, 픽트족, 게일족)과 융화하여 오늘날의 프랑스인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실증적·합리적이다.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지방에는 체격·용모 등이 프랑스인과는 다른 바스크인이 살고 있다.[17] 프랑스 국경 근처에는 독일인, 룩셈부르크인, 왈로니족, 플란데런족 등이 거주한다. 현대에는 EU권내의 각 국가로부터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의 북아프리카와 세네갈, 기니 등의 서아프리카 및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옛 식민지 국가의 사람도 다수 거주하며, 특히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 벨라루스, 러시아, 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에서 온 슬라브계 민족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10.2. 언어[편집]

고대 갈리아 프랑스인이 사용하던 골어는 라틴어로 대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라틴어에서 발전한 프랑스어가 국가언어가 되었다. 영국에 이은 식민제국건설로 인하여 프랑스는 이에 따라 국제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가 형성되었다. 프랑스인의 프랑스어에 관한 애정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켈트어 계통의 브레통어, 로망스어 계열의 오크어, 게르만어 계열의 알자스어 등의 각 지역어가 있으나, 프랑스의 강력한 1언어정책으로 인하여 소수어에 대한 공적 지위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프랑스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전 세계 인구는 약 2억 9,000만명으로 추산된다(아프리카 24개국, 캐나다 퀘벡 지역, 유럽 일부지역 포함).

한국에는 개화기 시절 한국이 서구 국가들과도 교류를 시작하면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1880년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에 의해 최초의 한불사전인 한법자전에 편찬되었고, 1901년 샤를 알레베크에 의해 불한사전인 법한자전이 편찬되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서울 정동에 설립된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10.3. 교육[편집]

2.5~3세 때 에콜 마테르넬에 다니는 것으로 프랑스인의 교육이 시작된다. 의무 교육은 에콜 프리메르(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 콜레주(중학교)까지 이어지고 대학 진학파는 리세(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들어간다. 프랑스의 노동법은 만 16세 미만의 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리세에서 1학년은 스공드, 2학년은 프러미에, 3학년은 테르미날이라고 부르고 모든 학교에는 유급이 있다. 대입 시험(바깔로레아)의 경우,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랑스어, 영어 시험을 보며, 20점 만점에 10점 이상이 되어야 3학년으로 진학이 가능하며, 3학년 때 각각 전공에 따른 시험을 본다. 대학은 모두 5월만 되면 학년말 시험을 치른다. 여기서 두 번 떨어지면 해당자의 전공은 그 어느 대학에서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10.4. 종교[편집]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가 매우 뿌리깊은 나라이며,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위그노를 필두로 한 개신교 종파도 생겨났다. 현재는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무슬림들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을 지킨다. 다만 프랑스 정부의 공식 종교 정책은 라이시테 원칙으로 불리는 종교-정치 분리 원칙이다.

11. 문화[편집]

프랑스는 지난 수백년 동안 서양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동시에, 문화적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왔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이름을 떨쳤기에, 오늘날 프랑스는 풍부한 문화와 유산을 지닌 국가로 여전히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는 전국을 통틀어 무수히 자리잡은 문화유산과 유적지 덕에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박물관수는 1,200여개를 넘으며 매년 50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것으로 집계된다. 프랑스 정부는 중요 문화유산을 직접 관리하는데, 이를테면 국가 사적지 85곳을 관할할 의무를 지닌 국가유적센터를 설립해두고 있다. 여기에 등록 문화재로 총 43,180건을 지정해두고 있으며 그 유형은 주거용 건축물 (고성), 종교용 건축물 (성당, 바실리카, 교회), 조각상과 기념비, 정원 등이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프랑스의 문화유산은 총 45곳으로 집계된다.

11.1. 미술[편집]

프랑스 미술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미술과 플랑드르 미술이 전래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중세 프랑스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장 푸케는 이탈리아로 처음 여행을 가서 초기 르네상스를 접한 최초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기 퐁텐블로파 회화는 프리마티초, 로소 피오렌티노 등 프랑스로 건너온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유명 화가였던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도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17세기부터는 프랑스 회화가 주류로 부상하면서 고전주의를 통해 차별화되기 시작하였다. 1648년 장바프티스트 콜베르는 프랑스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루이 15세의 명으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창립하였으며, 1666년에는 이탈리아 예술계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위해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도 설립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은 옛 바로크 양식을 좀 더 수정 계승한 로코코 양식을 발달시켰다. 이 시기 궁정에서 활동하던 앙투안 와토, 프랑수아 부셰, 장오노레 프라고나르가 프랑스의 대표 화가로 거듭났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예술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나폴레옹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선호하여 자크루이 다비드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는가 하면,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구가하던 미술 아카데미는 아카데미즘이라는 주류 양식을 정의하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예술 창작의 중심지로 거듭났으며,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미술을 지배하는 두가지 사조로 테오도르 제리코와 외젠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그 다음으로 카미유 코로, 귀스타브 쿠르베, 장프랑수아 밀레로 대표되는 사실주의가 부상하였고, 궁극적으로 이는 자연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 회화의 영향력이 한층 더 두터워지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의 회화가 발달한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꼽힌다. 이들의 뒤를 이은 폴 세잔, 폴 고갱, 툴루즈로트렉, 조르주 쇠라 등의 2세대 인상파 화가들은 아방가르드 미술에도 한몫하였으며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과 같은 야수파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로 넘어가면서 파리에 거주하던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개척하였다. 또한 빈센트 반 고흐,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당대 화가들도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의 각 박물관들도 이 시기부터 회화와 조각품의 수집에 나서게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가 소유한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모나리자 등의 18세기 이전 옛 명작들을 구입 및 인수받아 오늘날의 초대형 컬렉션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 국가 소유 미술품 가운데 인상파와 야수파 회화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 미술을 정리하기 위한 대책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1986년에 설립되었다.

모더니즘 이후 현대미술은 프랑스 국립 근대미술관이 관할하고 있으며 1976년 조르주 퐁피두 센터로 이전하였다. 이들 세 국립미술관은 한 해 17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명실상부 프랑스의 대표 미술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 파리에 함께 위치한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으로 그랑팔레와, 시립미술관인 파리 현대미술관이 있다. 파리 외에도 유럽과 프랑스 회화를 아우르는 미술관이 각 도시마다 설립되어 있으며 리옹 미술관, 릴 미술궁전, 루앙 미술관, 디종 미술관, 렌 미술관, 그르노블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11.2. 건축[편집]

중세 시기 프랑스에서는 각지의 봉건 귀족들이 권력 과시를 위하여 요새화된 성채를 지었는데, 프랑스어로 '샤토' (Château)라 하는 이들 고성 중에서 현전하는 대표 작품으로 시농성, 앙제르성, 뱅센성, 카타르성 등이 있다. 이 당시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주류를 이루던 로마네스크 건축을 따랐으며, 대표적인 건물로는 유럽 최대의 로마네스크 교회인 툴루즈의 생세르냉 대성당,[32] 클뤼니 수도원 유적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뒤를 이은 고딕 양식은 본래 '프랑스식' (Opus Francigenum)이라 불리던 양식으로서,[33] 일드프랑스 지방에서 처음 유래하여 전 유럽에 퍼져나간 최초의 프랑스 고유의 건축양식이 되었다.[34] 이 때문에 프랑스 북부에는 초창기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대성당이 다수 자리잡고 있는데, 고딕 양식의 시작점이 된 생드니 대성당은 물론 샤르트르 대성당, 아미엥 대성당도 중요한 대표작이며, 프랑스 국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렝 대성당도 빠질 수 없는 프랑스 고딕양식의 예시이다.[35] 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 관련 시설에도 고딕 양식이 적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로는 아비뇽의 교황궁이 있다.

15세기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스 건축의 발전사도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프랑스 궁정으로 초청되어 프랑스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루아르 계곡에는 왕궁이 여럿 지어지게 되었는데, 1450년 몽소로성을 시작으로 샹보르성, 셰농소성, 앙부아즈성이 그 예시다.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 중세가 끝날 무렵에는 바로크 건축이 기존의 고딕 건축을 대체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은 종교 건축보다는 세속 건축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 바로크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베르사유궁이 있다. 베르사유궁의 확장 공사의 설계를 맡은 쥘 아르두앵 망사르는 바로크 시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건축가로 떠올랐으며, 앵발리드의 돔 설계에도 참여하였다.

11.3. 요리[편집]

프랑스 요리(France 料理, 프랑스어: Cuisine française 퀴진 프랑세즈[3])는 서유럽에 있는 프랑스의 요리이다. 수세기에 걸친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 발전하였다.

프랑스 식사의 순서는 이렇다. 아페리티프(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한두잔의 술)→오르되브르(불에 조리하지 않은 전채)→앙트레(애피타이저, 그런데 이 앙트레라는 말도 기원은 어원으로만 보면 입구, 시작, 들어가기의 전채(前菜)라는 의미가 역시 있다)→푸아송(생선)→비앙드(육류)→살라드(채소)→프로마주(치즈)→데세르(후식)→프뤼(과일)→카페(커피)→코냑이다. 그러나 정식의 식사에선 이 순서가 전부가 아니라 20가지 이상의 음식이 나오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14세기에 등장한 타이유방 (Taillevent)으로 더 잘 알려진 요리사 기욤 티렐(Guillaume Tirel)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는 향신료를 적게 쓰고, 허브를 더 자유롭게 사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프랑수아 피에르 드 라 바렌(François Pierre La Varenne)을 시작으로, 프랑스 요리는 나폴레옹과 다른 고관들의 유명한 요리사인 마리앙투안 카렘에 의해 더욱 더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 요리는 20세기 조르쥬 오귀스토 에스코피에에 의해 체계화되어, 오트 퀴진 (고급 요리)의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에스코피에의 주요 업적은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발견되는 지방 요리를 다수 배제하였다.

20세기 시대와 그 이후로 음식탐방과 미슐랭 가이드는 프랑스의 풍부한 부르주아 요리와 시골요리 등으로 프랑스 시골지방에게까지 관심을 받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음식 재료와 음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많은 수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은 그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기를 지닌다. 한때 지역 음식으로 머물렀던 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치즈 (프로마주)와 포도주는 프랑스 요리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다양한 품종과 통제화된 명칭 법률인 원산지 통제명칭 와인(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아펠라티옹 도리진 콩트롤레[4])은 지역적으로 전국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11.4. 스포츠[편집]

프랑스는 하계올림픽을 1900년, 1924년에 개최하였으며 2024년에도 개최할 예정이다. 이들 세 대회 모두 파리에서 개최하였으며, 2024년 대회로 파리는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 3회 개최 도시가 된다. 동계올림픽의 경우 초대 대회인 1924년 샤모니 동계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1968년 그르노블, 1992년 알베르빌 대회를 개최하였다. 프랑스 선수단은 사이클과 핸드볼에서, 동계 종목에서는 알파인스키에서 강세를 보인다.

프랑스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는 축구이다. 프랑스는 FIFA 월드컵을 2회 (1938년, 1998년) 개최하였으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8년과 2018년 2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축구 다음으로 인기있는 스포츠는 럭비이다. 다만 장마리 르 펜과 같은 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자 내지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럭비가 선수들의 대부분이 백인이기 때문에 축구보다 더 좋아한다는 의견도 있다.

야구의 경우 국내리그인 다비시옹 엘리트가 있다.

12. 시차[편집]

프랑스는 여름 시간제를 실시하고 있다. 3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1시간 앞당겨진다. 보통 한국 표준시(KST)와의 시차는 8시간이고 여름 시간제가 적용될 때는 7시간 차이가 난다.

13. 문서 출처[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한 내용을 알립니다.